옛날에 교인들이 별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을 때 목사들이 설교를 어렵게 했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세상의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자부심이 어떻게 보면 학문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동시에 교만이 담겨져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신학이라는 학문은 말할 것 없고 신학교라는 동네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전혀 예수님과 관계없는 천박한 가치관이나 무당 푸닥거리하는 소리를 해도 수만명 교인들이 몰려드는 교회들이 교권과 신학교를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교회라는 동네가 세상에 대해 별로 건강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치권력에게 이용당하거나 시녀역할을 하는 비극적인 현실들을 현대 역사속에서 우리는 보아야 했습니다.
오늘날 불교라고 해서 뭐 기독교만큼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동네는 내가 신경쓸 동네가 아니니 문제 삼지않는 것 뿐입니다. 오래전 시카고에서 스님 한분이 내게 “목사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은 다른 분인가요?”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날만 되면 노인아파트에 사는 교인들이 자기들은 교회가면서도 불자들이 절에 가려고 나오면 마귀나 사탄이니 비난하고 욕을 하고 겁을 주고 그러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스님이 제게 던진 가슴아픈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못되게 하는 짓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예수쟁이들이 많다는 것이 답답한 일입니다.
1960년대 뉴욕은 미국 기독교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피부색갈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람이 판단되는 세상을 만들겠다” 꿈을 꾼 마틴 루터 킹목사의 인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역사속에서 맨하탄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의 설교자들이 주일 아침 설교를 하면 뉴욕 타임즈 기자들이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받아쓰고 그날 신문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교회는 상징성 이상의 역할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주 단순한 분석이지만 쉽게 말해야 할 복음을 지식인들의 지적만족을 주는 설교로 전락해서 그런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이 쉽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천박한 물질만능주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설교가들이 대형교회를 이루어가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생긴 역반응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500주년 맞이하면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입니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뿌리는 진정한 진보주의입니다. 어떤 진보인가요? 하나님 사랑 예수님 은혜의 진보입니다. 문제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문제 가운데 ‘엘리티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적 교만과 더불어 민중이니 어쩌구 하지만 진정 현실 세상속에 들어와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내려는 헌신이 없고 허공을 때리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뉴욕을 대표하는 Redeemer Church라고 있는데 그 교회 팀 켈러목사를 보니 성경적 보수의 뿌리를 지키면서 목회는 세상속으로 들어와 진보적 변화를 이루려는 시도를 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그 교회를 찾아옵니다. 저는 뉴욕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그 목사님 목회를 관심있게 보면서 배울것이 많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어떻게 우리들의 교회에서 하나님 이야기와 인간들의 삶이 만나는 설교가 회복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을지 올해 많은 기도와 고민 그리고 과감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