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있어서 세월의 흐름을 가장 실감나게 느끼는 때가 감사절입니다. 꼭 40년전 아버지가 추수감사주일 설교하시다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하나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60년대 초반 미국 유학을 떠나셨다가 가족 이민 초청하기 위해 근 10여년 떨어져 있던 아버지와 만난 지 꼭 3년이 되어 조금 정착하려고 하는 때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동생들은 고등학생 중학생이었는데 참으로 앞이 캄캄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60의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목회하시던 할아버지가 투옥되신 후 16세 나이로 작은 형과 함께 월남하시다 형은 인민군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어린나이에 홀로 남한에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사셨습니다. 아버지 일기를 읽어보면 월남 초기에는 “부모님 하루 빨리 만날 날을 기도합니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일기에는 “부모님 살아는 계시는지요…”로 그 이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잔인한 현실로 받아들여졌을 때 일기를 보면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부모님 산소라도 찾아 뵐 날을 손꼽아 기도합니다.”라고 잉크 반 눈물 반으로 매일의 일기를 끝맺었습니다. 살아 생전에는 단 한마디도 고향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기에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 그분이 살아오신 삶을 알 수 있었습니다.
늦게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실때는 너무 작은 교회를 목회하시기에 저는 그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코딱지만한 교회 챙피하다. 그만해.”라고 주일날 교회 갈때만 되면 나는 불평을 했었습니다. 20명도 안되는 작은 교회인데 원로목사님까지 계셨고 사모님이 반주를 하셨는데 주보에 엄연히 345장이 되어 있어도 그 할머니는 245장을 치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웃으면서 “사모님, 345장입니다.”하면 그 할머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째려보고는 “그냥 합시다.”하고 그냥 245장을 반주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엄청 착하셨던 원로목사님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셨습니다. 월급을 받을 수 없는 목회였기에 밤일을 하셨고 나이 40중반에 이르러 영주권 받기 위해 포기했던 못한 공부를 마치려고 공부까지 시작하셨다가 결국 50도 한참 안된 나이에 쓰러지고 마셨습니다.
바울이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처럼 저도 입에서 이 고백이 자주 나옵니다. 아버지 떠나고 하늘이 무너졌던 날들이 지난지 40년입니다. 가을이 깊어질 때마다 애통의 슬픔을 감사의 고백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그득합니다. 신학교 졸업할 때 그랬고 목사안수 받을 때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아버지 생각은 눈물을 가져옵니다.
1980년대 많이 불렀던 노래 ‘그날이 오면’이 생각납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내 형제 빛~나는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그날이 오면…/그날이 오면…/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그 아픈 추억~도/아~ 피맺힌 그~기~다림도/헛된 꿈이~ 아니었으리/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어둡고 아픈 시절의 노래였는데 제게는 은혜로 가슴을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