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점심 식사하러 교회 마당 뒷켠으로 나가다 보니 코스모스와 무궁화가 나란히 옆에 있었습니다. 코스모스는 어린시절부터 좋아하던 꽃입니다. 어제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에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 필까요? 왜 다른 꽃이 질 때 피나요?” 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짠하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우리들은 매년 가을이 되기전에 초등학교때부터 노력봉사 동원되어 서울에서 의정부 들어오는 도로변에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코스모스는 장미처럼 화려 하지도 않고 백합화처럼 고급스럽지도 않지만 소박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입니다. 가을의 초입에 뉴욕 후러싱 땅에서 내 사랑 코스모스와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보니 참 좋습니다.
벌써 오래 전인데 한국에 있는 후배가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기에 그냥 주어진 목회 열심히 하고 시간나면 텃밭 가꾸고 재미있게 산다고 했더니 “전형적인 소시민적 자기만족에 빠져있군요.”하면서 나를 성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도 해봐 재미나.” 그랬더니 “영웅적인 삶을 살아도 시원치 않은 판인데 그렇게 소시민적 만족에 빠지는 것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말아라.”고 했더니 “전화 끊어요.”하더군요. 그런데 정말 이 소시민적 행복이 그립습니다.
소영웅주의에 빠져서 어설프게 설쳐대는 인간들보다 소시민적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은 최소한 다른 사람들 안면방해는 하지 않아서 괜찮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래전 이전 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동안 급성장 한다고 정신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 일년 그러다가 정신차리고 기본목회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 적이 있습니다. 뉴욕에 오면서 목회의 재미가 기본기의 재미입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 시가 얼마나 참 말인지 요즘 많이 고마워 합니다.
교회가 급성장 할 때는 내가 공중에 혼자 날라다니는 무림의 고수라는 착각속에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부흥도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주춤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고 잠시 후퇴하기도 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다시 땅에 발을 딛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아픔도 기쁨도 같이 느낄 수 있고 나도 보고 너도 보고 하나님도 다시 보이는 재미가 있습니다. 언제인가 젊은 집사 한 분이 실패의 경험이 너무 아프다고 하기에 “아니야. 실패가 없다면 인생 재미 없는 거야. 두고 봐라 실패때문에 하나님 은혜가 엄청 크다는 것 깨닫는 날이 올 거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런 성숙한 말을 하는 내가 스스로 대견 했었습니다.
언제인가 장로님들과 무슨 회의를 하다가 “요즘 제가 목회에 확신도 자신도 점점 없어집니다.”라고 했더니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겁납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무슨 제안을 했는데 반대 의견을 내시기에 “저도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반대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드렸더니 반대 제안을 하신 장로님이 저보다 더 약해지시는 것 같아서 얼마나 또 송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역시 장로님들은 저보다 앞서서 인생 성공도 실패도 다 경험하셨기에 올라가기만 바쁜 것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해야 하는 지혜를 다 터득하신 것 같았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하는가?” 조용필씨가 몸을 비틀며 노래하는 것 같이 목사들은 가끔 “누가 목회를 아름답다 하는가?” 온 몸을 비틀며 노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있으면 40년 바라보는 목회 여정에서 요즘 목회가 참 좋습니다. 재미있습니다. 행복합니다. 물론 어려운 문제가 별로 없고 교인들도 신사적이고 왠만한 고비는 다 넘긴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산전수전 경험하고 나니까 어떤 의미에서 억지로 이기려 하거나 무리해서 이루려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편안한 것 같습니다. 내 뜻대로 된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잘못되는 것 아니라는 것 알만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을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굴곡은 많았지만 그래도 평생 행복한 목회를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재미있고 행복한 목회를 하다가 언제인가 저도 바울처럼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이라.”는 엄청난 고백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