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만 해도 짚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금 잘사는 아이들은 하얀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니 외삼촌이 가죽으로 만든 단화를 사 주셨습니다. 천하에 내가 가장 잘 사는 부자 기분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파트타임으로 돈을 벌어 Converse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그때는 그 운동화가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Nike 운동화가 생기면서 신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80년대 초반 내가 보스턴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 모시던 홍근수 목사님이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작은 아들에게 목사 아들은 Nike 를 신을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의사 아들 친구들과 지내면서 자기도 그 아이들이 신는 신발을 신고 싶다고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할 때 서로를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8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 목회하면서 셋방살이 목회를 오래 했습니다. 연회에 가면 내가 미국교회 목사보다 연급 끗발이 높은데 월요일이 되면 그 목사는 휴일을 지내고 나는 관리책임자가 사무실에 붙여놓는 리스트에 따라 청소를 했습니다. 부엌 오븐도 닦고 유리창도 닦고 아이들이 널려 놓은 교실도 청소해야 했습니다. 셋방살이 면하는 목회를 꿈꾸었습니다. 애틀란타에 가서 예배당 건축을 두 번이나 크게 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성공한 목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개척교회 하면서 월요일이면 교회 청소를 하던 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연합감리교회가 1천2백만 교세를 자랑했는데 지금은 반토막 났습니다. 교세가 약해지니까 교단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고 자부심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단이 왜 교세가 약해졌나요? 당연히 지난 총회 동성애자 목사 안수 결정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교단은 늘 그랬습니다. 일찍부터 사회적 약자와 소수민족의 권익에 앞장 선 교단입니다. 여자 목사 안수를 일찍 해주었습니다. 한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 이민자 교회를 앞장서 개척하고 지원했습니다.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과 한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이 감독으로 세워지고 여성들이 감독으로 많이 세워진 교단입니다. 그리고 한인 목사들이 미국인 교회 목회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연합감리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사고팔지 않고 그대로 넘겨줍니다. 후러싱제일교회는 220여 년 전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교회인데 49년 전에 한인교회가 받았습니다.
흑인도 그랬고 여자가 목사 안수 받는 총회 결정이 날 때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소수민족과 약자 편에 서고 열려 있는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만과 반대 세력이 생기는 것이고 그 결과 오늘날 교세가 많이 줄었습니다. 저는 지난 4월 총회 결정 전까지 동성애자 목사 안수 반대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교단 법 ‘장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교단 법이 바뀌었습니다. 이로 인해 8,000 교회가 탈퇴했습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교단의 그런 결정이 우리 이민교회로서는 품어내기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지만 저는 교단에 남아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릴 것 있어서 남는 것 아닙니다.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고 후러싱제일교회 담임목사로서 교회가 분열되는 것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룩한 대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심, 십자가 구원, 예수 부활 이것 만이 타협할 수 없는 ‘Non-negotiable’이지 다른 것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화를 통해 타협도 양보도 할 수 있습니다. 정의 평화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도전 받고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니까요. 연합감리교회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내일부터 피츠버그에서 동북부지역총회가 열립니다. 총회 보고서에 보니 뉴욕연회를 위시한 여러 연회 주일 출석 20명 미만인 교회가 50% 이상이었습니다. 교단분리로 더 줄었을 것입니다. 그 보고서를 보면서 후러싱제일교회가 교단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단분리 문제가 터지면서 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후러싱제일교회는 오랜 세월 많이 내고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 리더십이 이민교회를 마치도 제국이 식민지를 대하듯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문제는 미국에 사는 소수민족으로서 우리가 앞으로 헤쳐 나가고 고쳐가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1983년도에 교회 개척하고 처음 예배드릴 때 네 명 참석했습니다. 설교하는 나, 반주하는 아내, 1살 된 딸 그리고 그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린 대학생 김혜영이었습니다. 지지난 금요일 시카고에 장례식이 있어서 갔더니 40년 전 개척교회 때 교인들이 왔습니다. 60살을 바로 넘은 김혜영이도 왔더군요. 그때 교인들이 지금도 다 자기들이 속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개척 당시 신앙생활이 행복했다 합니다. 진짜 친구는 어려울 때 함께 있습니다. 진짜 교인들은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지켜줍니다.
저는 후러싱제일교회가 교단이 어려울 때 어른 역할하고 의리를 지키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