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전 와싱톤 세이비어교회 창시자 고든 코스비목사님을 감미준(감리교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목회자들이 찾아 뵈었을 때 제가 그 어른에게 “21세기 목회자들이 붙잡고 살아야 할 화두가 무엇인가요?” 여쭈었습니다. 그분 말씀은 ‘being an authentic self’(진실된 존재로 되어감)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원칙’(principle)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어떤 인물(personality)로 인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원칙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한 스승 밑에서 목회를 배웠습니다. 당시 저는 20대 초반 그 목사님들은 40대 초반이었는데 정말 어려웠고 존경했습니다. 목회 첫 스승 홍근수목사님은 서울법대 출신이면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신 철저한 청교도정신을 바탕으로 사신 장로교 목사님 이셨습니다. 훗날 한국에서 통일투사로 그분의 삶 단면만이 드러났지만 제게는 목회의 기본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청렴결백이 삶의 기본이고 설교는 빈틈없이 신학적으로 철저하게 준비된 내용만 증거하셨습니다. 저와 문화가 너무 다르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자유분방한 일거수일투족을 못마땅해 하셔서 항상 “너를 보니 앞으로 감리교의 미래가 암담하다.”하셨습니다. 20대 초반 어린 저에게 한달에 한번 대예배 설교를 시키시고 월요일이면 평가 시간을 가지셨고 본인의 설교도 월요일 오전이면 저에게 평가하도록 하셨습니다. 제가 어리어리 감을 잡지못하고 횡설수설하면 한숨을 쉬시면서 항상 같은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감리교단이 걱정이다.” 그러던 중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니 안식년을 떠나시는 주일 설교를 마치시고는 자기 가운을 나에게 입혀 주시면서 “여러분 오늘부터 김정호목사가 일년간 담임목사입니다. 저는 혹시 보스톤에 와야 되는 일이 있어도 김목사 허락 받고 올 것입니다.” 하시고는 장로님 장례식 단 한번 오시고 일년내내 교회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가 보스톤한인교회입니다.
두번째 목회는 연대 물리과 출신으로 구약학 박사학위를 하시고 노자 장자 서양 동양 철학세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드시는 곽노순목사님 밑에서 배웠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수사학이나 논리에 박식한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신문에 저와 관련된 글이 나왔는데 저에게 불리한지 유리한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놈아, 젊은놈이 왜 유리와 불리에 관심 가지느냐? 진리만 너의 관심이 되어야지.” 탓하셨습니다. 당시 시카고지역 박사학위 공부하는 목사들이 주말마다 목사님 댁에 모여 밤새 이야기 나누는 날이 많았는데 제가 가끔 손을 들고 질문하려고 하면 못하게 하셨습니다. “너는 아직 질문할 실력이 안된다.” 그러시면서 매주 책 한권 씩 던져 주시면서 읽고 오라 하시고는 혼자 앉혀 놓고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들이 많이 고맙고 그립습니다.
오래전 Jim Collins가 쓴 ‘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수퍼스타 기질을 가진 지도자가 운영하는 회사는 그 사람이 있는 동안 잘될 뿐이고 위대한 기업이 되지 못하지만 원칙을 가진 지도자가 운영하는 회사들이 위대한 기업으로 발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스승들에게 배운 것은 사람됨과 예수믿음의 원칙입니다.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교회가 위대한 교회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함이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하는 교회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 어려움의 중심에는 원칙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해가 가능한 말씀이지만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를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칙’으로 교회를 지켜내는 평신도리더들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딴에는 좋은 교회이기에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고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목사 의존도가 큰 교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예수 원칙으로 교회를 잘 지켜내어 위대한 교회되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합동임원회가 있습니다. 교회 운영원칙을 세워가는 회의입니다. 예수님 마음과 말씀 원칙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