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회는 물론이요 사회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는 진리와 사실에 관심이 없고 배우려는 겸손함이 없으면서 자기 입장과 주장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정치세계나 교회 강단이나 길과, 진리와 생명을 모색하기 보다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파괴를 임삼는 못된 일들을 저지릅니다.
저의 목회인생에서 가장 감사하는 것은 훌륭한 스승들과 좋은 교인들을 만난 것입니다. 만남의 중심에 예수님을 만나는 삶의 거룩한 변화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교회를 세워가는 사랑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배움에 목말랐기에 스승이 너무 귀했고, 그 스승들에게서 배운 자유와 자신감이 있었기에 교인들 앞에서 헛된 몸짓으로 폼을 잡지 않았고, 허튼 소리나 거짓으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못난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존중했기에 건강한 목회가 가능했었습니다.
80년대 초반, 신학의 세계는 첨예하면서도 공부 자체가 세상 변화와 긴밀한 연관이 있었기에 정말 돌이켜보면 학생으로서 복받은 시대였습니다. 치열하게 칼과 칼이 갈아지는 거장들의 만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배움에 배부르고 행복했습니다. 제 20대 초반 목회 스승은 독일신학자 엘흔스트 브로허의 영향을 받아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고 진정한 크리스천은 참된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셨습니다. 20대 중반 스승은 노장사상과 선불교 한 때는 라지니쉬 초기 뉴에이즈적인 분야에도 심취하셨던 분입니다. 두 분 모두 같은 신학교 동기면서 젊은 시절 가장 친하셨는데 인생 후반에 이르러서는 신학적 입장도 첨예하게 극과 극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분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셨고 다른 한 분은 보수반공주의자이셨습니다. 사회정치변혁을 교회가 관심가져야 할 과제로 여긴 분이 홍목사님이셨고, 구름타고 땅에 떨어져 사는 가르침을 주셨던 분이 곽목사님 이셨습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입장으로 볼 때 두 분의 공통점이 있다면 두 분 모두에게 제가 첫 부목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저 한 사람 놓고 열심히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홍 목사님의 영향을 먼저 받았기에 곽 목사님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성 질문을 자주하다보니 어느 날 하산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쫒겨난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서 홍 목사님께 곽 목사님에 대한 비판을 했더니, 그 분은 가만히 저를 바라보신 후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아직 곽 목사를 평가할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한다. 훗날 공부 제대로 한 후에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벌써 40년 가까이 되어가는 일이지만 저는 지금도 제 스승들이 던져주셨던 삶의 화두를 놓치 않고 있습니다. 보스톤에서 만난 홍 목사님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하나님 나라 모형을 제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치셨다면 시카고에서의 곽 목사님은 내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 그리고 진리와 자유를 살게 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홍 목사님은 믿음의 실천을, 곽 목사님은 존재의 넉넉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장황하게 옛 스승 이야기 하는 것은 배움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옛 시절 나와 스승들의 배움과 가르침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요즘 큐티리더 모임에서 많이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편하게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려는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가진 리더들을 세워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이야기를 진실되게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입을 열면 정리가 덜 된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지만 점점 개선되고 있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문제는 출처가 불 분명하고 파괴적인 가짜 뉴스입니다. 진실함이 가능한 건강한 대화의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필요가 만나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회복이 있고 행복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