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큰 관심은 가상화폐(cryptocurrency)와 가상세계(Metaverse)입니다. 가상화폐가 시작될 때 천불어치만 샀어도 지금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앞으로는 가상세계의 현실이 실제의 현실을 능가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요즘 일본에는 이 가상세계를 살도록 경험하는 장사들이 늘어나는데 보통은 한 두 시간 들어갔다 나오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현실세계로 나오지 않고 가상세계에 들어가 있는 시간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바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ance, confidence)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 assurance)니…”(히 11:1)라 외쳤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저는 세상 문화를 따르는데있어서는 언제나 늦었습니다. 지금 인터넷 사용도 극히 제한된 내용만 할 줄 압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감을 잡지도 못합니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중독이 되거나 가상이 실상을 대치해 버리는 세상이 된다는 것에는 위험한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가상의 세계는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세상인데, 현실세계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대한 세상의 흐름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삶의 현실이 너무 힘들 때 도피할 곳이 필요하기에 가상의 세계가 위안을 주고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 현실을 떠나 가상의 세계에 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칼 막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것은 잘못된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세상의 실상은 아편이 아닐까요? 유토피아를 제시하면서 인간의 주체적인 삶이 무시되고 존엄을 파괴하는 것들은 아무리 좋은 세상을 약속해도 아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약속 하나님 나라는 ‘실상이고 증거’라고 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실상이고 증거일까요? 어제 목회스텝 회의에서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이전처럼 과일을 가지고 나와 강대상에 놓는 것은 코로나 방역을 생각해 어려우니 예배당 앞에 큰 박스를 놓아서 깡통 음식 같이 잘 포장된 것들 가지고 와서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자고 했습니다. 대강절 기간에는 교인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삶의 기쁨을 주는 한가지를 하자고 제안 했습니다. 일단 주일학교 어린아이들 데리고 동물원 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떻겠는가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 나라는 무지랭이 제자들과 다니시면서 함께 밥 먹고 아픈 사람들 고쳐주시고 장터나 들판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해주시고 배고픈 현실 보리떡 다섯개와 말린 생선 두마리로 오천명이 먹을 수 있는 것을 현실화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배운 제자들이 잠시 예수 십자가 죽음으로 좌절에 빠졌지만 부활 주님 만나고 성령 받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 2,000년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거창하고 신기한 가상의 세계가 아닌 땅의 사람들(암하레츠, Am-ha’ aretz)과 매일의 삶에서 이루어내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암하레츠’를 대변하는 미가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고 친절하게 사랑을 베풀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미가 6:8)이라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너무 복잡하고 추상화하고 거창하게 만드는 일 그만해야 합니다. 복음은 실상입니다. 가상세계 만드는 허망한 짓들은 그만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살아가는 땅의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상과 증거로 만들어내는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