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초기 곽노순목사님이 나를 엄하게 혼내신 적이 있습니다. “젊은 놈이 왜 유리와 불리를 생각하느냐? 진리만 관심 가져라.” 20대 초반 첫 스승이셨던 홍근수 목사님은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교회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보스톤을 떠나 시카고 곽목사님 밑으로 가서는 도마복음을 알았고 노장 사상 등 폭넓은 철학과 종교 세계를 오르내리는 가르침을 접했습니다. 문제는 곽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나로서는 뛰어 넘어야 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하산 명령을 받은 후 홍목사님을 찾아 뵙고 곽목사님을 비판했더니 “너는 아직 곽목사를 평가할 수준이 안된다. 겸손하게 더 배웠어야 했는데…” 하셨습니다.
곽목사님은 예수 복음의 핵심을 오늘 이 삶에서 천국의 누림과 속세 헛된 것으로 부터의 자유로 보셨습니다. 홍목사님은 하나님 나라와 사회변혁의 사명으로 여기셨습니다. 홍목사님은 철저한 칼빈주의적 목회를 하셨고 곽목사님은 다석 유영모적 깨달음 목회를 하셨습니다. 곽목사님은 목회 다른 것 거의 안하시고 주일 설교 15분만 하셨는데 설교를 하시면 에어컨이 없는 예배당 더운 여름 오후 예배시간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홍목사님은 서론 본론 결론이 정확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일이면 교인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숨죽이며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경청했습니다. 그 어른들 당시 40대이셨는데 출중한 실력에 언제나 감동이었고 깊이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나는 설교를 할 때 내 머리 속에서 두 분이 “이놈아 그걸 설교라고 하는 것이냐?” 꾸중을 듣는 심정이 많았습니다.
스승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를 찾아와서 길을 묻는 목사들 때문입니다. 내 스승들은 40대에 어느 질문에도 눈과 귀가 열리는 말씀을 주셨는데 나는 60중반을 넘어가면서도 주저주저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경 하나 붙잡고 목회 현장과 접목시켜보려고 지난 40여년 설교를 했지만 지금도 새벽기도를 포함 모든 설교가 시원시원하지 못하고 늘 아쉽고 답답한 마음이 많습니다.
요즘 교단과 관계된 문제에 대해 저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 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제가 이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감리교는 어떤 교리 문제로 시작된 교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리 문제에 대해서는 웨슬리가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는 감리교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때 “본질에는 일치, 비본질에는 자유, 모든 일에 사랑으로”(In Essentials Unity, Non-essential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해야 한다 했습니다. 이 말은 감리교회는 정답이 아니라 해답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차이점을 찾아 갈라지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고 공통점을 찾아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역시 그러면 됩니다.
우리 세대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생각하는 것(critical thinking)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문화는 일방적인 자기 주장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씀하면 듣는 것이 배움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이나 교회나 가장 큰 문제는 쥐뿔도 모르는 것 같은데 배우려 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는 일들을 쉽게 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때로 인생에서 말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은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안된 사람들에게 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때를 기다려야 하고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가만히 잠잠히 있어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배운 사람은 배웠으니 겸손해야 하고 못 배운 사람은 배우려고 겸손해야 하는데 아무나 막무가내로 무례하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세상이 되면 질서와 규모가 없어 망가지게 됩니다. 말의 황금률 세 가지로 첫째, 내가 말하려는 것이 사실인가? 둘째, 친절한 말인가? 셋째,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헌금생활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이 못 배운 바보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복 받는 삶과 주님의 뜻을 우선으로 하는 겸손한 신앙으로 살은 것입니다. 오늘 교회력 본문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상 받는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상벌의 기준이 분명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예배를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려 하고 설교를 듣고 깨달으려는 교인들은 거룩한 것과 귀한 것을 찾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