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홈런같이 보였는데 파울볼되는 것입니다. 축구경기에서는 슛을 멋지게 했는데 공이 꼴대를 맞고 튀어나올 때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슛을 하고 아슬아슬한 파울볼을 많이 때려도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홈플레이트를 밟고 들어와야 하고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야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승리’(win)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존재목적에 쓰임받는 것이 중요하지 남들 보기에 멋있는 파울볼 많이 때리면서 신나하는 교회되면 안됩니다.
오래전 기독교 100주년 세미나에서 어느 교수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리새인 만드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몇년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때 종교개혁의 발상지를 관광가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습니다. 목사들도 보면 때와 계절에 따라 성지순례를 위시하여 각양각색의 영성순례라는 이름을 붙인 여행이 많습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성역 40년이 내일모래인데 아직 성지순례도 못했고 감리교 목사로서 요한 웨슬리가 감리교운동을 일으킨 영국 한번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잘했다는 것도 잘났다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날 교회에 목적을 상실한 프로그램들로 시끄럽고 바쁜 것은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삶의 현실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 했습니다. 나는 목회가 재미납니다. 힘들지 않고 어려운 일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무덤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체험되는 자유가 있어서 자족의 샘물에서 물을 마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조금 교만을 부려보자면 이민교회 나름대로 아주 큰 교회 목회를 해봤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밀물과 썰물에 대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친 풍파와 파도에 밀리고 쏠려다니던 교인들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파도를 타고 예수님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로 항해하는 변화를 보는 것이 행복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인도 캘커타 빈민촌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커서 사역자들이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문제가 큽니다.”라고 말할 때 “문제(problem)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선물(present)이라고 말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잘난 것은 태어나야하지만 잘 사는 것은 네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인생살이 모든 것이 그럴 것입니다.
이화대학 교목실장을 지내고 은퇴하신 손운산 목사님이 오래전에 나에게 “김목사, 교회 좀 크다고 교만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 나는 교회 작을 때도 교만했잖아요.” 그랬더니 “그래, 정말 그랬지.”하면서 한참 서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1980년대 초반부터 10여년 시카고지역 대학목회 목회실장을 하면서 일곱개 캠퍼스를 다니면서 성경공부하고 교회 두개를 개척해서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젊은 목사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함께 사역하던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아야 하기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개척교회만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목회했는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교인 50명을 넘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30대 젊은 나이에 누구에게 기죽어보거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내 목회가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손목사님이 “그래 정말 김목사는 교회가 작을 때도 교만했었지….” 인정해 준 것입니다.
젊은이 목회를 저는 ‘Kissing Frog Ministry’라고 불렀습니다. 개구리가 아닌데 개구리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냄새나는 못난 인간들에게 키스해주는 목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키스를 해줘서 천하제일 하나님 사랑받는 아들 딸 원래 본모습을 회복시켜주는 목회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작거나 크거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정말 교만할 정도로 행복한 목회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교만할 정도로 행복한 목회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