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성도추모주일로 지킵니다. 예배당 앞에 놓여있는 국화꽃들에는 먼저 하나님 부름 받아 떠난 이들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네요. 무심한 세월과 함께 그렇게 가슴 메어지던 슬픔도 나도 모르는 사이 희미해져 가는데도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 낙엽 뒹구는 가을에 볼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 저려오네요. 나도 그 동안 많이 아팠어. 자리에 누어서 밥을 못 먹을 때 머리가 빠져나갈 때 당신 모습이 왜 그리 어른거리던지 많이 울었어. 더 많이 살펴주고 챙겨주지 못했던 것 후회 많이 했어.”/“Gone but not forgotten, always in our thoughts. We miss you very much. We wish you were still here with us. We still love you very much!”(떠났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았어요. 아직도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함께 계시면 얼마나 좋을지 늘 생각합니다.)”

‘화요일에 모리와 함께’에 보면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야.”라고 제자에게 말해주는 스승의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우리의 삶에서 잊혀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때로 그 어느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살아있습니다. 교인들도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어도 우리 교회의 오늘 가운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하늘의 증인들’로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하는데 이것은 천국의 성도들과도 교통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산자와 죽은자 모두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먼저 천국의 성도가 되신 성도들과 교통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떠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태어난 것보다 더욱 엄연한 것은 우리도 때가 이르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다시 또 이민을 가야 하는 그것입니다. 생명을 바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남기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통’을 확장해야 합니다. 먼저 천국백성이 되신 분들을 감사함으로 추모함과 동시에 지금 이 땅에 살아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함으로 ‘교통’의 터전을 확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사람들을 살리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얼마전에 교인 한 분이 “목사님, 10월이 너무 잔인했습니다.”하면서 “빨리 11월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셨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하게 떠나가게 하소서….길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가 손님일 뿐 아무도 내 최후의 행방을 묻는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알아듣게 하소서/ 그 이름 빛이신 주여 한 점 흰 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엎디어 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그리움이 클수록 더욱 사랑하며 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