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드류신학교 온라인 강의를 했는데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하고 있나요?” 감리교회는 내적 경건과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외적경건 모두를 포함하는 통전적 경건(Wholistic Holiness)을 추구하는 교회이라는 것, 웨슬리가 “사회적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알지 못하며 ‘사회적’ 성결이 아닌 다른 성결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그것, 그래서 뭘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회정의 평화를 위한 일에 참여하고 설교할 때 그런 내용을 담아내려고 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정말 말 많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내는 것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도전이 제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이 좌우사방 차고 넘칩니다. “교회가 다 그런 것 아니다 문제가 있어도 개혁하면서 가는 것이다” 이런 식의 발언을 열심히 했지만 허공에 헛손질하는 느낌입니다. 교회가 도매금으로 당하는 것 같은 비판에 해명이나 변명하기에 많이 늦은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소리와 드러나는 일들을 보면, 교회들이 내놓고 있는 열매들이 악하고 썩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행실로 열매 맺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책임일 것입니다.
30년 전 쯤 제가 큰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시카고판 일면에 저에 대한 기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저를 돕는 사람들이 뉴욕에 있는 ‘헌법권리 수호 변호사협회’와 만나도록 주선해줬습니다. 변호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목사이고 너 같은 목사들이 그런 일로 억울함 많이 당한다. 크게 보면 마틴 루터 킹목사도 브라질 카마라 주교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삶으로 자기 명예를 지켰다” 그 변호사가 목사였습니다. 더구나 제가 존경하는 두분의 이름을 거론하니 법정으로 가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그분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목사는 삶으로 명예를 지키는 거 아니냐?”
교회에 대해 세상이 아는 것은 보여주는 모습과 내용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세상의 소금과 빛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즘 계속 토요일 아침 11시 급식프로그램을 위해 4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민망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교회를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어려울 때 찾아올 수 있는 교회되게 하셨습니다. 한주 전에 바이든 선거운동본부에서 한인교계가 원하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해서 발언을 했습니다. 1. 서류미비자들이 시민권 받을 법적 제도 만들라. 2. 아시안 차별과 혐오범죄 없애는 법안 만들라(그레이스 맹 하원의원 제안 법안 H.R. 908 지원) 3. 한반도 평화를 위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라(법안 1771지원). 얼마 전에는 앞으로 연합감리교단이 분리되면서 ‘인종/소수민족 정의와 공평 테스크 포스’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수락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 되려는 몸부림입니다.
목회하면서 많이 듣는 두가지 양극단의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말씀만 해주세요”와 “이제 교회 일 그만하고 큰 일을 하셔야 합니다”입니다. 제게는 목회하는 것이 큰 일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되라 하시는 예수님 말씀, 큰 영적인 말씀입니다.
누가 제게 “목사님은 항상 높은 곳에서 줄타기하는 목회를 하는 것 같아요”합니다. 좌우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목사되어 줄도 빽도 없는 서러움과 더불어 내딴에는 웨슬리언적 목회를 해보려다가 어려운 일 당하고 험한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여 년 좀 큰 교회 목회한다고 또 별소리 다 듣습니다. 그런데 정말 필요한 것은 설명, 해명, 변명이 아니라 삶에서의 증명일 텐데 이것이 어려우니 사도 바울도 “내가 죄인 중 괴수이다” 울부짖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웨슬레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이 ‘선행하는 은총’입니다. 모자라고 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시고 쓰임받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의지하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