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국 문민정부가 들어오면서 아주 잘 나가던 분이 저에게 무슨 일을 같이하자고 제안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카고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기에 안되겠다고 했더니 “김목사님, 그런 쪼끄만 교회 그만하고 함께 큰일을 해 봅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쪼끄만 교회’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나라를 위한 어떤 ‘큰일’보다 귀한 일입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십쇼”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자존심으로 버티고 의로운 혈기로 충만할 때이니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목회를 무시하는 것을 가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큰일’ 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어서 목회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랬지만 내 나름대로는 하나님 나라 역사에 쓰임 받는다고 여기는 자부심을 가지고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거창한 이름을 가진 단체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회변혁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목사’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기독교 보수 반동 세력’이라는 말을 듣고 다른 쪽으로부터는 왼쪽이다 빨간색이다 말 같지 않은 말을 계속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생 차분하게 가만히 조용히 살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운동’이라는 말이 내 삶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심훈의 상록수 소설의 영향으로 농촌운동의 꿈을 꾸고 새마을운동에 참여해서 도로변에 코스모스를 심고 커서는 민주운동 통일운동 그리고 지난 20여 년은 감리교 부흥을 위해 ‘1000교회 운동’이니 ‘느헤미아 부흥 운동’이니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변혁 운동이 아니라 교회부흥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변절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목사가 된 후 한 번도 내 중심이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구원자요 해방자이심을 포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40여 년 나의 중심을 붙잡아 주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나를 품어 주고 사람 만들어 준 교회이고 철들어가면서 인생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아버지 목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40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43세에 목회를 시작해서 20명도 안되는 작은 이민교회 목회를 하시다가 47세에 하나님 부름을 받으신 세상적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목회를 하셨지만 아버지의 삶과 목회가 오늘 나를 붙잡아 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한국에서 나름대로 먹고 사는데 어려움 없으셨을 텐데 목사가 되신 배경에는 북한 평양에서 목회를 하시던 할아버지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혈혈단신 홀로 어린 나이에 월남하셨던 아버지 일기에 보면 어느 날 “아버지, 이제 제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왜 하나님이 나만 홀로 이토록 외로운 남한 땅에 내려 보내셨는지 이제 깨달았습니다. 북녘에서 더 이상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남기신 몫을 제게 담당케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쓰셨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1981년도에 받았으니 꼭 43년이 됩니다. 나같이 성격이 급하고 무엇을 해도 쉽게 지루해 하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목회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나의 어머니 교회’라는 글을 쓰셨는데 나는 ‘나의 아버지 교회’입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목회’를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가 나를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갈릴리 출신 무지랭이들 12명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니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한 6:68) 대답했습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세상적으로는 능력 있던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떠날 자유도 능력도 없던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돌아보니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교회와 목회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붙잡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감사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