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뉴욕 근교 단풍이 절정이라 하여 추천 받은 폭포를 가보았습니다. 제대로 보려면 폭포 밑에서 위를 봐야 한다 하여 가보니 108계단을 내려가야 했습니다. 등산화도 신지 않았고 비를 먹은 돌계단이 겁이나서 그냥 돌아섰습니다. 오는 길 폭포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어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사진도 찍는데,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 보니 잎을 잃은 나무들과 떨어진 낙엽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다왔습니다.
저는 요즘 계절을 모르는 목회를 했다는 반성을 많이 합니다. 늘 봄과 여름, 열매맺음과 수확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는 잃어버리는 것과 땅에 떨어지는 것, 죽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오래 전에 친구 신영각목사님이 “김목사님, 겨울의 영성도 생각하면 좋겠어요”했던 충고를 생각합니다.
가수 차중락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아파하며 노래 했지만 정말 그럴까요? 낙엽은 떨어져서 가루가 되어 썩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울 씨앗이 봄이 되면 그 양분을 먹고 싹을 올리는 것입니다. 며칠 전 장로님 한분이 “목사님, 코로나로 다 무너졌어요. 사람들이 세우려던 그런 것들 미련두지 말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 봅니다”하셨습니다.
엊그제 한 분이 엄청 섭섭하셔서 한마디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랬을까요? 어떻게 교인을 문둥병자 취급합니까?” 제 방에 찾아오셨는데, 들어오시라 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이 누가 들어올 형편이 되지 않아서도 그랬고, 주일이라 바로 다음 예배가 있기 때문에도 그랬습니다. 참 많이들 섭섭해 합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외식을 안하니 사람 가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고 교회에 와서 커피를 마셔도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쓰고 대화를 하다보니 야박하고 인정머리 없는 목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 목회 장점이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것이었는데, 코로나는 완전히 저로 하여금 그 반대의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서 지켜내기 위해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장기화되면서 오히려 섭섭함과 원망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목사라는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사람을 환하게 반겨주기를 바라고, 어떤 모습이라도 어떤 말이라도 들어주고 품어주고 같이 어울려 주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예수님이라면 그랬을까요?”라는 질책까지 받습니다. 미안하고 민망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다른 사람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감염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배려하고자 했던 면도 없지 않습니다.
낙엽은 떨어져 밟히고 부서져 가루가 되어야 쓸모 있는 비료가 되는 것인데, 저는 그런 목회의 성숙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도 많이 주관적이었다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지속적으로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면 그 속마음을 잘 읽어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시인 백석의 ‘단풍’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사랑이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하여 청청한울이 눈부셔야 한다…. 10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지지우리지’는 황홀할 정도로 환하게 빛난다는 뜻입니다. ‘독한 원한’을 누군가에 대한 원한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라 해석하지만, 사랑에 원한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땅에 떨어지기 전, 사랑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태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성도추모주일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땅에 떨어진 지금은 천국백성되신 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있기에 오늘 여기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야 산다 하셨습니다. 이 계절 사랑으로 죽어야 사는 역설적 복음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