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간 새벽기도 히브리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6)와 “예수를 바라보라.”(12:2) 말씀이 많이 좋았습니다. 우리 눈과 마음이 예수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빼았겨 버리면 중심이 흔들리기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 삶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해 반응하기(react) 보다는 바라보고(observe) 생각하는 훈련을 합니다. 제가 지난 목회 중에 많이 반성하는 것이 급하게 말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시카고 목회의 젊은 시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글과 설교를 통해 급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애틀란타 목회할 때도 회의시간에 어느 교인이 “목사님은 민주운동을 했다는 분이 목회는 왜 독재를 하십니까?” 비판을 할 때, 화를 내면서 “근거도 없이 목회자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 인격모독 음해행위입니다.” 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왜 그리 생각하는지 대화를 하면 되는데, 나의 정당성을 지켜내려고 항상 공격적인 목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분은 교회를 떠나고, 오랜동안 목회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억울하게 공격받는 것 너무 싫어했습니다. 그렇게 목회해 온 시절도 40년을 넘겼습니다. 지난 세월 못나게 목회했던 것들이 소록소록 다 생각이 나기에 주님 앞에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난 1년 6개월 코로나 기간동안 새벽기도 말씀과 큐티나눔 줌미팅이 제게는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막혀있는 세상에서 말씀으로 열어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보편적 진리(로고스)가 내 심령 속에 들어오는 진리(레마)가 될 때 말씀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잘 보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추운 겨울 새벽 4시경 한시간 운전해서 파송 받은 교회에 도착하고도 가슴이 떨려서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50명 교회 목회하던 나를 300명 교회로 감독이 파송을 했는데, 교회가 거부해서 강단에 한번도 서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예배당 들어가면 기도하던 교인들이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어려웠던 때, 몸과 마음이 너무 떨려서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차안에서 시편 46편을 영어로 읽고 어설프게 방언으로 기도하고 예배당에 들어가면 신기하게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오히려 그 교회 교인들이 나를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이후 시카고를 떠나 애틀란타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의 흔적’이 예수 생명의 증표라고 한 의미가 무엇인지 좀 알면서 삽니다. 나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씀도 많이 생각합니다. 어느 영화 대사에 “내 인생, 이제는 기억(memory)이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 많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제 목회도 그렇습니다. 너무 일찍 목회를 시작해서 목사안수 40년이 넘었어도 법적 은퇴 나이까지 가려면 좀더 가야 합니다. 고마운 것은 예수님 말씀과 사도바울이 목회하면서 깨달은 믿음의 지혜들이 나를 위해 주시는 복음으로 내 심령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난 몇개월 ‘빌라도의 법정’이란 말을 많이 들었고 ‘조국의 시간’이라는 책도 보내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예수님이 아니고 물론 조국도 아닙니다. 저에 대한 무시무시한 말들이 난무했던 것들이 이제는 정리 되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분들은 ‘왜 아무 말 하지 않느냐’고 하고, 정리되면 기자회견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명예 훼손한 인간들을 법적 문제 삼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난 수개월 어이없고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일들이 제게는 남은 목회 제대로 하라고 주님이 주신 ‘백신’입니다. 인생 공부 잘했고 사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은 예수님이 하신 아주 기초적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남아있는 목회기간동안 더욱 철저하게 ‘예수 잘 믿고 예배 잘드리는 교회’ 세우는 일에 집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모든 일에 담겨져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