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목사였고 모태신앙이었지만 예수 믿는 재미를 진짜 본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어려서는 그냥 교회에서 노는 것 좋고 중고등부 때 역시 교회가 제 생활 거의 전부였기에 교회생활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시카고에 이민와서는 영어도 못하지 사방팔방 저를 열등의식에 빠지게 하는 것들 천지인 세상에서 위로가 되고 보람을 주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내 인생 중요한 도전을 주신 분은 당시 교회 고등부 담당 고재식 선생님입니다. 훗날 한신대 총장을 지내신 분이신데, 세상을 예수님 시각으로 보는 것과 사회속에서의 빛과 소금 사명을 가르치셨습니다.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는 훈련 그리고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이해 하도록 하는 성경공부를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재식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훗날 아시아연합신학 총장을 지내신 아버지 친구 임택권 목사님 추천으로 보수 장로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고선생님이 “너는 마틴 루터 킹같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하시며 보스톤 신학대학원에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보스톤 생활에서 홍근수 목사님을 만났고, 그 이후 곽노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분 모두 고재식 선생님과 신학교 동기셨습니다. 세분 모두 제가 공부를 하기 바라셨습니다. 언제인가 고선생님은 아르헨티나에 계시던 보니노 미구에즈(Jose Miguez Bonino) 교수와 안식년 연구하시러 가는 길에 시카고에 들리셔서 “나는 네가 공부하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나와 함께 일년간 아르헨티나에 가자”하셨습니다. 개척교회할 때라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지랭이 갈릴리 출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셨고, 부활하셔서도 또 찾아오신 생각을 하니 제가 좀 제대로 공부한 인간되기를 바라셨던 스승들의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없이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던 나를 이끌어주신 그 어른들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크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만남으로 마음을 주셨고 그래서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게 하셨는데, 요즘 내 목회가 그리되지 못함에 안타깝습니다. 홍목사님은 신학교 2학년 뭘 제대로 모르는 나를 붙잡고 매 월요일 자신 설교를 평가하게 하셨고 한달에 한번 설교하게 하고는 내 설교를 평가해주셨습니다. 곽노순 목사님은 제가 6개 대학 캠퍼스 성경공부 열심히 인도하던 어느날 부르시더니 “너는 배운 것이 없는 놈이 뭘 그리 많이 남을 가르치려하느냐” 하시면서 책을 하나 던져주시고는 “다음 주 부터 책 읽고, 읽은 것 보고해라” 하셨습니다. 저 혼자 놓고 월요일마다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힌 제 급한 성격을 견뎌내지를 못하고 공부를 제대로 못하니 하산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나중에 홍목사님과 고재식 선생님께 곽목사님에 대한 불평을 했더니 두분 모두 웃으시면서 “곽노순을 평가하려지 마라. 네가 평가할 존재가 아니다”하셨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는 공부를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성경을 통해 어떤 획일적인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체적 존재로 해답을 찾는 공부를 했습니다. 설교학 공부도 보스톤에서 가장 험하고 가난한 동네에 들어가서 왜 여기는 범죄가 많은지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지 이런 목회현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베트남 독립운동과 공산혁명 지도자로 대통령을 지낸 호치민(Hồ Chí Minh)이 보스톤대학 다닐 때 백인교회에서 청소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는데, 왜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기독교를 배척했는지 그런 것 생각하는 공부도 했습니다. 그러니 제 목회의 시작이 어찌했을지 짐작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신학의 스승은 선생님들이었지만 목회의 스승은 교인들입니다. 어린 저를 목사로 만들려고 애쓰신 보스톤 한인교회의 장로님들, 뭘 모르면서도 자신만만했던 저를 믿어주고 함께 꿈을 꾸었던 시카고 한마음 교회와 아틀란타 한인교회 교인들 그리고 이제 후러싱제일교회 여러분이 저에게 목사가 뭐하는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이끌어주십니다. 항상 늦게 깨달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은혜가 항상 더 크고 감사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