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엘리야 로뎀 나무 설교 방송을 들은 어느 목사가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현실과 관련하여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나요?”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지금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가운데, 부흥이 아니라 침체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봐야 할 때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뼈아프게 깨달았을 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임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더 했습니다. “지금은 더 아파하고 더 회개해야 할 때이지 우리가 얼마나 잘하고 잘났는지 자화자찬할 때가 아닙니다.” 성령은 가난한 심령에 역사하지, 교만한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인터넷 신문을 보니 갤럽-애스펀 미국 가치 지수 조사 결과에 미국인들은 ‘가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지만 실제로 가족을 귀하게 여길까요? 인생 살면서 어린이 청소년 청년 때 가장 화를 많이 낸 대상이 엄마라고 합니다. 가족을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존재는 엄마인데 엄마에게는 모두들 그래도 된다고 여기면서 쉽게 화를 많이 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해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화를 잘 내고 자녀가 생기면 내 아들딸에게 함부로 화를 가장 많이 냅니다. 그러면서도 가족이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를 쉽게 주는 곳이 오늘 우리의 가정이라는 말이 과언은 아닙니다. 다윗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기도했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에 삶이 가깝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 11:29) 하셨습니다. 뭔가 잘못 배워서 내가 멍에를 메고 살고 남에게 멍에를 뒤집어씌우며 삽니다.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고 교회에 와서 못나고 못된 짓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멍에는 대부분 강대국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죄의 종노릇 하는 인생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신 말씀은 진리로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앗시리아 제국의 압제에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떨어지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며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멍에가 부러지리라”(10:27)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기름 부음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들이 뭔가 종교적인 열심과 업적을 통해 이루는 상급을 바라는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영적 교만을 가장 좋아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 죄의 종노릇하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복음으로 자유할 때, 다른 잃은 영혼들의 멍에를 풀어주는 사명을 감당하여 복과 은혜의 통로, 자유와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이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사용해서 모든 멍에를 깨뜨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