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에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서울 최우수 고등학교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탈북자 출신 수학자가 집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포기하려는 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머리 좋은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용기라고 말합니다. 잘하지 못했으면 다음에 다시 잘 하려고 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용기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소외계층입니다. 그런데 둘이 서로를 도우면서 치유를 경험하고 인생의 꿈을 회복하게 됩니다. 인생 쓴맛을 곱씹으며 살던 그가 수학공부의 재미를 알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수학이 참 아름답지 않니?” 하면서 뿌듯해 하는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회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려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으면 나도 이 대사를 사용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목회가 참 아름답지 않아?”
철원에서 열린 인권평화회의를 마치고 부천과 용인에서 건강종합검진을 하고 바로 다음날 뉴욕으로 돌아와야 하는 여유가 없는 스케쥴이었지만 꼭 만나야 할 친구가 있어서 조반을 했습니다. 직전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낸 친구입니다. 몇 년 전 뉴욕에 왔을 때 제가 “우리는 어린시절 가난했는데 어찌 불행하지 않았을까?” 했었습니다. 대답이 “너희 의정부감리교회 행복했잖아”였습니다. 자기는 천주교회 다니면서 내가 다니던 감리교회가 부러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를 꼭 만나고 싶었던 것은 지난 몇 년 대법원까지 법정투쟁을 해야했던 어려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만남의 자리에 그가 있었는데 어떤 기록과 관계된 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나 대화에 불행이 스며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시련의 기간이 시작될 때 태어난 손자 보는 행복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때로 행복도 결단과 용기입니다.
오늘 교회력 복음서 본문이 예수님을 만나 한센병 고침을 받은 10명 가운데 9명 유대인들은 그냥 가버리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알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병고침을 받았어도 소외당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심령’입니다. 은혜를 아니 감사에 이르고 그 감사로 육신의 병고침만이 아니라 총체적 존재가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영역에서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귀한 수확가운데 하나가 오래전 아틀란타에서 목회할 때 제 마음에 걸려있던 일이 풀린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사역자들이 긴장하고 잘하려고 무리를 하면서 갈등이 있었고, 둘 다 좋은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반목하게 되었었습니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하기에 떠나기 전날 송도에서 해물찜을 먹자고 불렀습니다. 그동안 서로에게 일어났던 목회 어려움과 아픔을 알기에 만나는 순간부터 반가움과 감사가 컸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어려울수록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고립되고 쉽게 무너집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행복하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찾고 아름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참 좋다”하신 그 원축복(original blessing)을 회복시켜주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국 뉴스를 보니 북한이 핵실험을 한다고 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서해에서 미군과 한국 해군의 전투함대가 합동훈련을 하는 영상이 나오는데, 일본 자위대 함대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섬찟했습니다. 만일 북한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군대가 한반도 땅에 들어오게 되는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종합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최첨단 의료시설은 물론 최고 서비스에 감동과 감사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우뚝 선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6.25전쟁을 치르고 휴전협정이 내년이면 70년이 되는데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이번 한국방문의 목적이 ‘국제인권평회회의’였기에 이런 현실이 더욱 가슴 아팠습니다. 한반도 동족상잔 ‘원죄’의 역사가 평화를 이루는 ‘원축복’의 역사로 전환되는 일에 교회가 쓰임받아야 할 것입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 조국강산 참 아름답지 않은가?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더 좋고 아름다울까?
“인생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목회가 참 아름답지 않은가?” “예수 믿음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