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시카고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던 어머니는 연례행사로 도둑과 강도를 당하셨습니다. 훔쳐가는 옷, 도둑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손님에게 물어 주려면 억울할 정도로 비싸게 부르는 값을 줘야 합니다. 강도는 총을 머리에 대고 위협하니 트라우마를 품고 살으셨습니다. 도둑 맞으면 힘들어 하시지만 강도를 만날때는 인종차별적 언어로 욕하셨습니다. 그럴때면 제가 “엄마, 제발 그런 인종차별적 단어 쓰지말아”하면, 어머니는 “너도 나처럼 장사하다가 강도 만나봐라”하셨습니다.
요즘 죠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인해 분노하는 세상을 보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인종문제에 대해 바른 말 많이 하고 시위가 있으면 열심히 참여했지만, 어머니는 영어를 못하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이민초기에는 공장을 다니셨고 훗날 세탁소 운영하시면서 여러 다른 인종과 삶의 바닥에서 같이 사셨습니다. 세탁소 주인이라 하지만 월세내고 세금내고 직원들 월급주면 어떤 때는 가지고 오는 것이 거의 없는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직원 그 누구도 인종으로 차별하지 않고 고맙게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어 잘 못하는 것을 알고 인종차별하는 손님에게 억울함 당하시면 서러워 우셨고, 강도 당하면 분해서 우셨습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북부 인종차별’(Northern Racism)과 ‘남부 인종차별’(Southern Racism)이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1863년의 노예해방은 말할 것 없고, 1968년도 ‘인권법’(Civil Rights Acts)이 만들어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북부 인종차별이란 진보성향 리버럴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나라 법이나 사회 가치관이 차별없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지만 자기와 다른 인종이나 문화권 사람과는 밥을 같이 먹지는 않는 차별입니다. 남부 인종차별은 피부색과 문화의 구별없이 밥은 먹지만 신분적으로 백인이 위에 있어야 하고 제도적인 혜택을 누리는 인종차별입니다. 남부 인종차별이 악하다면 북부 인종차별은 못된 것입니다.
죠지 플로이드 죽음에 분노한 시위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노력들이 제도와 법을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법이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 바닥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80년대 부터 인권과 인종차별 철폐, 정의와 평화 시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지 않았어?” “아직도 한반도 통일 안됐어?” 라고 놀리며 회의 많이 한다고 세상 바뀌냐는 것입니다. 아내는 소셜워커 였습니다. 언제인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네 목사들은 참 이상하다. 지하실에 갖혀있는 사람들에게 옥상에 올라가면 햇빛과 공기가 좋으니 그 더럽고 어두운데 살지 말고 옥상에 올라가라고 소리 높여 설교만 하면 세상이 바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자기네 소셜워커들은 문제있는 사람이 있으면 지하실에 내려가 수 없이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면 그 사람 설득해서 한 계단씩 올라 오도록 돕고 그러다 다시 지하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고 그렇게 해서 그 한 사람이 옥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소리지르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어쩌다 인종차별 철폐 시위에 참여하고 인종화합 특별 예배드리고 바른 말과 고상한 글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쉽다면 이 세상 이 나라 문제, 벌써 다 해결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나와 인종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가족도 원수같고 교회도 허구헌날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사네 죽네 난리인데 인종간 화합이니 정의 평화 이루는 것 구호 외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생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며 필라델피아 우범지역에 살면서 사역하고 있는 이태후 목사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그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성경학교를 보니 땀 흘리며 수고하는 젊은이들이 단막극을 하는데 예수가 하얀 옷을 입은 백인으로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뉴욕에서 간 우리 목사들은 놀랬습니다. 흑인 어린이들을 위한 연극인데 예수가 백인의 모습으로 분장되어 등장한 것입니다. 선한 일은 열심히 하지만 역사 의식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문제에 대한 평가와 분석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이드 라인에서 있지만 무더운 여름날 어린이들과 밥을 함께 먹고 예수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은 그냥 선하고 착한 일 열심히 하려는 선교적 마인드가 있는 교회 학생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고 옳은 것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 살아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태후 목사를 만나고 감동받은 것은 필라델피아 우범지역 아파트 앞에 꽃이 담긴 화분들을 예쁘게 가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왔다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동네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