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옛날에는 이랬는데 저랬는데 어쩌고 말을 많이 하니까 친구가 한마디 합니다. “착각 그만해라. 60중반을 넘었는데 왜 자꾸 40대 때 하던 것 지금도 할 것처럼 그러냐. 정신차려라. 조금 더 그러면 미친놈 소리 듣는다.” 위로하기는 커녕 잔인하게 현실을 지적해 줍니다.
며칠 전에 새 감리사가 교회를 방문하고 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습니다. 코로나 사태 끝나고 교회 회복과 부흥의 재도약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했습니다. 새 감리사 Rev. Abel은 40대 초반 젊은 흑인여성입니다.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감리사 잘해 보고 싶은 열정이 있습니다. 코네티컷에서 목회하다가 뉴욕으로 오니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데 그래서 신나고 좋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 저와 성격이 비슷합니다. 저도 뉴욕 목회가 다른 곳 목회보다 몇 배 힘든데 그래서 좋습니다. 쉽지 않으니 정신 바짝 차리게 되고 어려우니 도전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코로나 기간동안 내가 내 숨쉬는 소리를 듣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내 입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는 끔찍한 현실을 알았습니다. 얼굴에 조폭같이 고약한 인상을 주는 주름이 여기저기 보이고 작고 큰 버섯이 피어나고 눈꺼풀 작게 났던 점이 날이 갈수록 커져서 아주 잘보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 앞에 어떻게 보이는 것 예민하던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애써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가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뉴욕 목회가 좋은 것은 내 마음대로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 가지고 내 마음대로 되는 목회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추한 것인데 잘 안되니 감사합니다. 설교를 하면 펜클럽의 환호가 분명하게 들려오던 목회를 했었는데 뉴욕에서는 펜클럽이 아니라 앤티클럽이 여기저기 모여 열심히 활동합니다. 이것도 방심하지 않고 정신차리게 하니 좋습니다. 요즘 월요일 오전이면 교회력 설교 공부모임을 합니다. 멤버의 반은 미국교회에서 목회하는 30대 젊은 목사들입니다. 옛날 나에게 야단맞고 채플에 들어가서 손잡고 “하나님, 우리들 담임목사님에게 야단맞지 않게 해주세요” 울며 기도하던 친구도 있습니다. 다른 멤버들은 실력은 출중한데 세상이 아직 알아주지 않는 중늙은이 목사들입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어내는 시각이 나와 너무 다르기도 하지만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아픈 바닥의 현장에서 복음을 발견해 내는 삶의 지혜가 넘칩니다. 에모리 신학교 설교학 톰 롱 교수가 예전에 매학기 저를 초청 강사로 불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잘 하는 목사라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겸손히 배웁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목회자 멘토링 모임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내가 뭔가 잘하고 있고 젊은 목회자들에게 줄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사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보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난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해서 목회 어려운 목사들 기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실수한 것 잘못한 것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강의하고 사라지지 말고 배우려고 온 사람들과 같이 밥먹고 커피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랍니다. 가만히 보니 나를 목회 정신 재교육 시키려고 기획된 것 같습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주문을 하는 교회개혁의 확신을 가진 분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이런 당당한 사람들이 있으니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숨고르기가 하나님 주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내려와 보니 내가 많이 말하고 내가 뭘 잘하는 것이 드러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했습니다.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뭘 잘해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니 자유가 있습니다.
날숨을 하면서 내 속에 버려야 할 것들 버리고 들숨을 쉬면서 하나님의 것을 들이마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목회를 하면서 마음속에 손을 보고 싶던 인간들이 있었는데 내게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못나고 못된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단련시켜주시고 배신과 비열함을 보면서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 보게 하셨습니다.
40년전 보스톤에서 당시 미국 이민교회 최고 엘리트 목회자로 알려졌던 보스톤한인교회 홍근수 목사님 밑에서 목회수업을 하고 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마치고 시카고에 갔는데, 곽노순 목사님이 어느날 부르셨습니다. 시카고지역 여러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정말 잘하려고 열심이었던 때입니다. “너는 배운 것도 없는 놈이 뭘 그리 많이 가르치려 하느냐. 다음 주에 이 책 읽고 뭘 배웠는지 나에게 보고해라”하셨습니다. 매주 책 한권씩 주셨습니다. 나는 목회학 매스터(고수)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에게는 배운 것도 없는 놈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공부하기를 원하신 스승들이 고맙고 그립습니다.
가을입니다. 하늘을 보기 좋은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