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보고 이진숙은 ‘시대를 훔친 미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을 보듬는다. 손끝에 전해지는 아들의 몸, 그 촉감, 떠나기 전 아들의 머리털은 탐스럽고 육체는 탄탄하며 건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와 말없이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의 육체를 보듬는 순간, 아버지는 안다. 아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비난보다 앞선 이해, 따지고 묻는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가진 포옹, 이 작품은 … 깊은 용서와 숭고한 화해의 순간을 보여 준다. 구차한 질문은 구차한 변명을 낳을 뿐이다.”
헨리 나우웬은 같은 그림을 분석하면서 돌아온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손을 하나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손이요 다른 하나는 앞으로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강한 아버지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단정한 복장에 경직된 얼굴로 꼿꼿이 서서 인생 망치고 돌아온 동생을 품어주는 아버지와 동생을 정죄하면서 내려다 보고 있다 했습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챙겨 세상에 나가 탕진한 아들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진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못하는지 아들의 과거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살아 돌아 온 아들이 좋아서 동네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입니다.
며칠 전 한달 후에 연합감리교회 감독회장을 지낼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교단 어려운 때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무엇이 가장 힘드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대화가 안되는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쁨과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어느 곳에도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했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리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에 열심이었을까요? 병든 자가 고침 받으면 함께 기뻐해주지 않고 안식일에 고쳤으니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왜 그런 인간들과 밥을 먹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왜 예수님이 누구와 밥을 먹는 지 뭘 먹고 마시는지 그리 난리를 치는 것인지 이상한 인간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가장 잘 믿는다고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병도 고침 받고 사람 차별하지 않고 밥같이 먹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고 하나님 은혜가운데 살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면서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바리새인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30여년 전 목회 잘해보려고 친구목사들과 뉴욕에 와서 팀 켈러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4,000여명이 Redeemer Church 예배 출석했는데, 반정도가 한인2세들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한인교회에는 한인 2세들이 잘 안 오는데, 왜 당신 교회에 이리 많이 오는가?” 켈러목사님 답입니다. “당신네 교회들 대부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은 교회다. 그런 교회에 젊은이들이 왜 가고 싶겠는가?” 정말 자존심 상했지만 큰 도전이었습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되려면 바리새인적인 교회되기를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 14:17)했습니다. 남이 뭘 먹는지 마시는 지 그런 것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시비 걸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성령 안에서 정의, 평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세 남자가 내 속에 다 존재합니다. 내가 아버지이고 탕자이고 큰 아들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한 일이 많이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죄 많은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시는 하나님 은혜가 날로 크기만 합니다. 남의 아픔과 어려움을 보면 나도 그랬으니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아무 상처 없는 사람보다 상처 많은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복음적인 교회되기 위해서 바리새인 문화를 과감히 내버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