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러네요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골라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세상 직원을 채용할 때는 그렇지만 가정이나 교회는 사람을 골라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고쳐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서 다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도록 하신 것도 고쳐서 쓰신 것입니다.
신경정신과 양창순 박사는 가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칼럼에서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또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불가사의한 관계라고 말합니다. 가족에 대한 네가지 오해가 있다고 하면서 “첫 번째는, 가족관계는 노력을 안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족에겐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다 표현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족관계는 단순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네 번째는 가족이란 나의 모든 기대치를 다 걸어도 되는 관계라고 여기는 것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쉽게 생각해서 오히려 가족관계로 인한 상처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것이 좋지 않으니 중도를 지키라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신심이 지나치면 맹신이 되고 즐거움이 지나치면 중독이 되고 헌신이 지나치면 오버가 되고 관심이 지나치면 오지랍이 되고 계율이 지나치면 경직이 되고 지혜가 지나치면 허무가 됩니다.”
중용으로 중심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스승께서 제게 “목사는 가을의 선선함과 겨울의 냉혹함을 알아야 하는데 어찌 항상 봄과 여름이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왜 잘 못했을까? 돌이켜 보면 자신감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외로와야 한다. 철저하게 홀로되어 하늘과의 만남에 접근해야 한다.” 누누이 책망하셨는데, 잘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people pleaser’였던 것입니다. 남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컴플렉스, 그리고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능력이 약하고 남에 의해서 자기 존재감이 확인되어야 하니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이 저를 치유하는 레마(rhema)였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서 자유하게 되니 예수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신학 공부가 내 자신을 발견하는 너무도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열등감에 짓눌려있던 나를 보스톤신학대학원 구약 헤렐 Beck교수님이 일으켜 주셨고, 엘리자베스 Bethenhousen 교수가 신학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줬습니다. 공대에서 화공학 공부하면서는 경험하지 못한 스승들을 신학교에서는 만났습니다. 입학할 때 기죽어 찌그러졌던 학생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공부에 대해 당당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스톤한인교회에서 홍근수 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우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을 비로소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과정이 나의 치유와 회복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찾아가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5월 가정의 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 주 부모님 모신 묘지 사무실에서 새 묘비를 세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효도는 새 묘비를 보러 시카고에 빠른 시일에 가는 것입니다. 가서 부모님을 기억하는 분들 모시고 식사 대접해야 하고요. 그리고 이제 저도 할아버지입니다. 아이들 효도는 별 관심 없고 손자가 집에 오면 안아주고 뽀뽀 해주는 행복이면 족합니다.
가정에서 지켜야 할 선과 경계를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 함부로 해서도 안되고 잘되라고 기대하는 것도 일방적이면 무례가 됩니다. 가족이라고 내 감정 함부로 표출하는 것 아닙니다. 가까울 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고 서로의 마음에 예민해야 합니다. 솔직히 가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가정 행복에 도움이 됩니다. 아내나 아이들이 뭐라고 하면 그냥 끄떡거리고 웃으면 됩니다. 내 생각과 의견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데 사사건건 뭐라 참견하지 않아도 되어 좋습니다. 어차피 아버지라는 존재는 너무 가깝게 밀착되면 부담스러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좀 떨어져서 웃어주고 고개 끄떡거리는 역활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나이에 들어 사람에 대해 다시 배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요즘 선과 경계 그리고 거리를 두는 훈련을 합니다. 더 늙기 전에 철저히 홀로되어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집중하는 연습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다 섭섭함과 실망에 빠지는 망신스러운 인생 살지 말고 주님을 알고 바라보는 일을 인생 최고 목표와 목적으로 삼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