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어머니를 아버지 묘에 모셨습니다. 지난 주일 밤에 덴버에 도착해서는 피곤이 몰려와 어머니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평온하게 마지막 숨을 쉬시면서 하나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17년전 애틀란타에 모시려고 했을 때 목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덴버 동생에게 가신 이후 어머니를 뵙기 위한 덴버 방문이 열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불효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면 더 큰 불효가 될 것을 아시고 기다렸다 가신 것 같습니다. 덴버 고별예배와 시카고 발인예배 모두 지역 감리교 목회자들이 조가를 불러주어서 큰 위로가 되었고, 두 곳 모두에 후러싱제일교회에서 보내준 조화와 아름다운 꽃바구니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뉴욕에서 장로님들이 오셔서 덴버 고별예배후 손님 식사대접을 해주셨고, 시카고 장례후 식사는 연합감리교 평화위원회에서 해주어 고마움으로 민망했습니다. 어머니를 함께 모신 아버지 묘에 교회에서 보낸 꽃을 놓으니 하얗게 눈으로 덮힌 주변에 돋보이게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아빠 이제 고아다.”라고 했더니 딸이 “할머니는 정말 당당하게 사셨고 마이클 삼촌 극진한 돌봄받았으니 천하 가장 행복한 어머니셨을거야.”라고 우회적으로 위로를 합니다. 아들은 “내가 재작년에 할머니와 1년 함께 살아보고 깨달았는데 아빠부터 우리 식구 모두 성격이 강한 것은 할머니 닮아서 그런 것 알았어.”합니다. 어머니는 43년전 아버지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시고 단 한번도 우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인생 불평하지 않으시고 아프셔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세탁소에 나가셨습니다. 아들이 목사가 되었지만 줄도 빽도 없는 무지랭이 목사로 고생할 것 아시고 한번도 제 목회를 세상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작을 때도 왜 부흥 못시키냐 묻지 않으셨고, 제 목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때도 한마디 말은 물론 내색도 안하셨습니다. 그냥 주일 아침이면 변함없이 계란찜 만드셔서 교회 가기전에 밥먹고 가라고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한번도 오지 않으셨고 본인이 섬기시는 교회에 가셨습니다.
장지가 시카고인지라 시신을 모시기 어려워 화장을 했습니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가 한줌의 재가 되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엄마, 미안해.” 한마디와 함께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 재가 되어서도 어머니는 “뭐가 미안해. 나 잘살았다. 행복했다. 그리고 너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된 것 나 평생 자랑스러웠다.”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치매가 왔을때 장남인 나에게는 그 사실 알리지 않고 은퇴를 하고 어머니를 돌봤던 동생이 “엄마 최선다해 살았어. 살아서는 내가 돌봤지만 이제부터는 장남이 엄마 돌봐라.”합니다. 나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목사가 되겠노라 집을 떠난 후 어머니 곁을 떠난 것만이 아니라 어린 동생들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동생들에게 큰 아들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생들도 처음에는 무책임한 내가 야속 했겠지만 형은 아버지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어머니 돌보는 것은 자기들 몫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땅에 뭍혀 아버지 곁에 가셨고 영혼은 하나님 계신 천국에 가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추모를 하면서 자기들 아비인 내 이야기는 없고 할머니 돌본 삼촌들에게 고마와 하는 말을 해주고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속에 큰 사랑으로 남아 계시다는 것을 말해줄 때 어머니가 품고 키운 내 자식들이 다 컷다는 생각에 많이 고마웠습니다.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리며 가족과 교회가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가시는 길 함께 지켜준 친구들과 동역자들이 있어서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