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고 3년차를 맞이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코로나로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스크 쓰고 사는 것 정도는 답답해도 견뎌낼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과 슬픔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생업의 어려움, 막히고 닫힌 인생의 현실을 견뎌내야 합니다. 교회들도 이미 많이 문을 닫았고 앞으로 1/3정도 더 그럴 것이라 합니다. 무덤 문을 가로막은 큰 돌이 열려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어제 뉴저지에서 열린 세월호 8주기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목사에게 1년중 가장 바쁜 부활 주일을 앞둔 토요일에 다리를 건너 다녀오겠다고 하니 무슨 순서를 맡았느냐고 부목사 한 분이 묻습니다. 그냥 뒤에 서서 멀리서라도 추모하는 마음들과 함께 있다 오겠노라 했더니 아무 말을 안합니다. 그 말 없음의 의미가 뭔지 묻지 않았습니다. 생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장이나 피난민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도 싶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한다고 세상 달라질 것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실 그 자리 어디라도 찾아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인종차별과 아시안 혐오 범죄 고통의 자리,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전쟁으로 죽어가는 어린 군인들, 아직도 분단된 내 조국의 현실… 암과 투병하는 교인들,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교인들… 생업과 생존의 어려움과 두려움… 모두 예수님 부활하시고 찾아가실 삶의 자리들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시고 천하 만방에 자기 존재를 확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조용히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보지 못했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화내고 있는 도마, 배신한 죄책감에 빠진 베드로… 찾아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요한 14:19)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오늘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살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능력으로 살게 합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옳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논쟁에 이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는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지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덤과 감옥 문이 열리는 것,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사는 일입니다.
며칠 전 한국을 방문중인 교인이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고난주간! 망월동 5.18 묘지 다녀왔습니다. 고맙다고… 눈물 흘리며 반겨 주었어요.” 저는 그 권사님에게 왜 ‘5.18’의 아픔이 본인에게 40년 넘은 세월에도 중요한지 묻지 않았습니다. “권사님, 좀 더 계시면 세월호 4.16 그 땅에서 기억해 주고 오세요.” 부탁만 드렸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땅에 요즘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장애인들 고통의 자리에도, 아프가니스탄 난민 자녀들에게도, 동족에게 차별당하는 아픔을 살아내야 하는 탈북 새터민들에게도… 두루두루 다녀오시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제 제 SNS에 ’에스더하재단의 유가족(자살, 사고, 질병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위한 마인드 테라피’ 안내가 올라왔습니다. ‘유가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죽음의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새롭게 살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 부활 축하 휘황찬란한 장식과 수준 높은 음악 프로그램, 그리고 잘 준비된 예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에서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그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악한 영을 물리치신 땅입니다.
보통 교회들을 보면 부활주일 이후는 거의 방학 모드로 들어갑니다. 절기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성령강림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고 교회가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심 감사합니다. 성령님 우리 가운데 오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사람 살리고 사랑하는 일에 쓰임받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