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주일드리는 예배는 예수님 부활하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예배를 통해 예수의 사랑과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헨리 나운은 “진정한 영적 삶은 육신의 삶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기를 결정하셨기 때문에 육체 밖에서는 신성한 삶이 있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영어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지옥에 내려갔다 오셨다(He descended into hell)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의 죽음 권세까지도 다 이기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지옥의 영향력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없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완전한 승리가 있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가 무효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활 주님을 믿는 엄청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삶에 주어지는 어려움, 아픔, 좌절과 죽음의 현실이 너무도 엄연하지만 부활 신앙이 있기에 소망을 가지고 최후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땅으로 내려와야 하고 ‘성육신’화 되어야 합니다. 사두개파들의 제사종교가 되고 바리새파들의 율법만능 제도가 되어버리면 부활 주님이 찾아오실 틈이 없게 됩니다. 부활 주님은 갈릴리로 가셔서 인생좌절을 곱씹으며 옛날 살던 땅으로 돌아가 살고있던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말은 땅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 거룩한 구원역사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물러남’(creative withdrawal)이란 말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목사가 때로 물러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놔두고 홀로 기도하신 것은 ‘거룩한 외로움’의 훈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행여나 목사가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역사하시는데 그래서 그분만이 주인되셔야 하는데 목사인 내가 뭘 해야 한다는 생각한다면 직업병입니다. 때로 예수님의 ‘계심’(presence)을 위해 목사의 ‘비킴’(absence)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지켜야 할 사명은 교회가 땅으로 내려오고 성도들도 삶속에서 하나님 다시 만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도 예수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고 자꾸 드러내고 만들어내는 헛된 거룩함과 종교 프로그램들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세우고 만족에 빠지는 일들 열심히 하는 것들 그만두어야 성령의 역사하실 여유와 여백이 열리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어제 저는 처음으로 우리교회 149가와 38가 코너 마당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목련(magnolia)을 보았습니다. 왜 지난 4년간 보지 못했을까요? 없을것으로 전제한 것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의 ‘프레임’(frame)이 그런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전제’가 눈으로 보는 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부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네 삶속에 찾아오신 부활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석구석 드러나고 있는 살아남과 사랑의 증거들이 이번 부활의 계절 큰 감사와 감동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당신이 메시아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가?” 질문했을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고 고침받고 행복을 찾는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허망한 질문만 반복해서 던지지 말고 찾을 것을 찾고 볼 것을 보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고 사랑하는 역사를 볼수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가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