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어느 정당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양두구육 말랬더니 이제 개머리 걸고 개고기 팔아”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두구육은 ‘양의 머리를 내 걸어놓고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라 합니다. 한국정치는 제가 훈수 둘 실력이 안되지만 왠지 교회 동네에서도 생각해 봐야 하는 화두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를 걸어 놓고 예수와 전혀 관계없는 물건을 팔고 있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란 영화 장면 가운데 전도에 열심인 사도 바울을 예수가 찾아와서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예수 내가 아니다.”라고 하니 바울이 “당신이 바로 그 예수 같기는 한데 미안하다. 사람들은 진짜 당신보다 내가 전하는 예수를 더 필요로 한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 영화는 1955년 Kazantzakis라는 사람이 쓴 소설을 가지고 만든 것이기에 당시 기독교계가 영화 상영 반대 데모를 심하게 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살아 내려와서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니 기독교계가 발칵 뒤집혀졌던 것입니다. 그 영화가 상영되면 교회가 망한다고 생각해서 난리치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난리를 치니 오히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구경해서 한동안 인기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가 쓴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지적됩니다. 카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포함한 이교도들 수천명이 화형 당한 사형장에 예수가 나타나니 민중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합니다. 그때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예수를 체포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무엇 하러 이곳에 왔느냐? 왜 너는 우리를 방해하느냐?…. 우리는 너의 이름으로 1,500년의 세월동안 너의 과업을 완수했다. 너는 더 이상 우리에게 뭔가를 고할 권리가 없다… 악마가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라고 할 때 왜 그러지 않았느냐? … 우리는 하나님과 손을 잡는 대신 악마와 손을 잡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비밀이다.” 그런 참담한 말을 들은 예수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는 내용입니다.
저는 요즘 수요일 ‘모세오경 영성강론’(조나단 색스) 책을 중심으로 말씀 나누는 것이 참 좋습니다. 얼마 전에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참 좋아요.” 그랬습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과 길을 가면서 대화한다 생각하니 내가 교인들 감동을 주려고 한다거나 대단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좋습니다. 지금 잘 모르지만 길을 가면서 일어나는 인생의 이야기들을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성숙해 진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훈련을 함께 받는다 생각하니 목사가 교인들에게 정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감이 사라져 좋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하신 일은 함께 길을 가면서 머무르는 곳에 말씀 듣고자 하는 사람들 있으면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배고프면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아픈 사람들 있으면 고쳐 주시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거 안 믿으면 죽여버린다 못 믿으면 지옥 간다 그런 말 없으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가운데 천국을 경험하게 하시고 말씀 듣는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얼마 전 큐티모임에서 우리 교회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예수님 만나서 이미 천국이 그 마음에 있고 교회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화단에 물을 주는 것도 천국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물을 주는 것이 다르고 성가대 노래를 불러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와서 자기 인생 독소와 쓰레기를 쏟아 붇는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렇습니다. 참숯처럼 공기를 맑게 하고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은 마음이 천국이기에 그렇습니다.
지난 월요일 있었던 ‘설교와 목회 모판 새롭게 짜기’ 모임에서 고요한 목사님이 발표한 내용 가운데 Fred Craddock 교수의 말이 인용되었습니다. “내가 십대 후반일 때는 설교자가 되길 원했다. 내가 20대 후반 일 때는 훌륭한 설교자가 되기 원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다른 무엇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한다. 단순히 살고, 풍성하게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신실하게 섬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 수 있기를 원한다.”
오래전 크래독 교수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설교하는 여러분, 제발 교인들을 시시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존중하기 바랍니다. 그러니 제발 설교 시시하게 하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