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저지 아콜라교회 안명훈목사님 부친 안상빈목사님 장례예배에 다녀왔습니다. 10여년전 제가 그 교회 집회인도하러 왔을 때 어르신께 소원이 무엇이신지 여쭈었더니 첫째는 아들 목사 목회 잘 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고 둘째는 몸이 건강하고 다리가 약해지지않아서 주일날 교회 버스타고 내릴 때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살아계신 안 목사님이 많이 부러웠었습니다.

어제 안명훈목사님이 아버지는 은퇴하시고도 항상 설교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 설교하시느냐 여쭈면 설교할 때는 없지만 감리교 목사는 항상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라 하시며 그리하셨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아콜라교회 설교를 여러번 부탁드려도 단 한번도 설교를 하지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혹시라도 말 실수해서 아들 목회에 누가 되는 일 하고 싶지않아서 그러신다 했다 합니다. 그 말을 나누며 안명훈목사님이 잠시 울음을 삼키는데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제가 안목사님에게 “우리는 우리 아버지들 반만이라도 그렇게 진실되고 인격적인 목사가 될수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장례를 집례하는 장철우목사님이 고인께서 자신이 전도사때 목사심사위원이셨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우리 지방 감리사이신 김성찬목사님이 정회원 안수동기인데 장목사님이 우리 심사위원이셨습니다. 목사안수 심사통과 되던 날 장목사님에게 잘못 보여서 세상 말로 빠따 맞을 뻔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20대 중반이었고 장목사님은 혈기왕성한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제30대 초반시절 이승운목사님 한인총회 회장하시고 장철우목사님 총무하실 때 회의 따라다니며 편지봉투에 우표붙이고 허드렛일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승운목사님은 자신은 후러싱제일교회라는 큰교회목사이고 나는 작은교회 목사일뿐만 아니라 민주운동 통일운동이나 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상대도 안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틀란타에서 목회할때 이목사님 손주 돌잔치를 하는 날 이익화사모님도 오셨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네 할아버지가 내가 네 아버지 담임목사이고 너 세례 줄 목사라는 것을 옛날에 알았으면 그때 나에게 그렇게 안하고 잘하셨을텐데 참 아쉽다. ” 지금은 제가 그분이 목회하신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어제 은퇴목사님들이 많이 오셨는데 30년전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선배어른들 80대가 모두 넘으셨더군요. 물론 나도 60대에 들어왔고요. 지난세월 네편 내편 갈라졌기도 했고 이래저래 싫어하고 좋아하던 관계들도 있었지만 세월이 뭔지 그런 생각 하나도 없고 어른들은 저를 반가워 하시고 저도 어른들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우리교회 창립목사이신 김병서목사님 내외분도 어제 저를 반가워 하셨습니다. 작년 여름 냉면을 사주시면서 본인 장례집례를 부탁하셨습니다. 당연히 창립목사님이신데 왜 그런 걱정을 하시느냐 했더니 은퇴하고 교회 여러곳 옮겨다니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누가 장례를 해줄것인지 불안해지더라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김목사는 이북출신이잖아. 아무래도 나같이 고향잃고 살아온 사람 아픔 잘 이해할 것 같아. 나 죽으면 꼭 장례해줘.”하시는데 냉면을 먹다 말고 목이메였습니다. 저는 서울태생이지만 아버지가 평양태생이시니 이북출신 목사님들은 항상 저를 동향사람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뉴욕에 오니 뉴욕과 뉴저지에 저와 지난 30여년 목회의 길을 공유해 온 선배어른들은 물론 친구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얼마전 어느 모임에서 50대중반 목사가 “선배님들 이제들 그만 좀 싸우세요. 우리가 불안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싸우는데?”했더니 “김목사님 항상 안목사님과 싸우고 이목사님과 싸우고…”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제 친구목사가 명언을 합니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런다. 저 사람들은 지난 30년 세월 저러면서 오늘까지 왔다. 사랑해서 그래.”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생각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왜 그러는지, 생각없이 살다보면 서로 서로가 얼마나 귀한줄 모르고 지나갑니다. 가정도 교회도 선배어른들도 친구들도 후배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두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