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못쉬겠다” 지난 월요일 미네소타에서 경찰이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서 숨지게 한 죠지 플로이드(Floyd)가 외친 마지막 말입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미네소타를 시작으로 여러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 ‘푸뉴마’입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입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한 바로 그 ‘생기’입니다. 사람의 숨은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성령강림은 교회가 하나님의 숨을 받아 시작된 날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사람이 하나님 생령으로 숨쉬도록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도 사람의 호흡이 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마스크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미국에서 만도 10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 군사력과 경제력이 최고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중국은 미국보다 인구가 몇배 많은데 사망자가 5천명 한국은 300명이 안됩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전세계 36만명 넘는 숫자에 미국이 10만을 넘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나요?
사람의 숨통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문제가 미국에 존재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대통령을 위시한 나라 지도자들을 잘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정, 사법, 입법 삼권은 물론 연방으로 시작하여 주와 시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숨통을 열어주는 가치관과 정책을 만들어내는가? 여기에 큰 변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뉴욕에서 가장 코로나로 피해를 많이 당한 것은 저소득층 흑인들과 히스패닉들입니다. 그리고 미국 전체로 보면 원주민 Native American 감염율이 특별히 높았습니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역사의 뿌리에 깊게 감추어져있고 제도와 법에 담겨져있습니다. 연방으로 시작하여 주와 시로 내려오고 계속 바닥으로 내려가다 보면 더 적나라하게 인종차별이라는 악한 사탄마귀가 사람들의 숨통을 조입니다. 숨통을 열어주는 제도와 정책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은 숨을 쉬어야 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코로나로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기 답답함을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되는 소수민족 특별히 흑인들에 대한 숨통을 막는 일들이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죠지 플로이드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인종차별의 희생자 모두입니다. 숨이 막혀 죽어간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컷을까요?
시위가 폭동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코로나 사태만으로도 세상이 어렵고 어지러운데 이런 상황에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런 사태를 빌미로 더 악한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폭동’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폭동이 아무 연고없이 갑자기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폭동은 당연히 우리가 강경하게 비판해야 하지만 동시에 폭동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조건들에 대한 비판 역시 강하게 해야 한다. ‘폭동’은 자기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언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결국 이겨내고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가 노예제도였는데,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인종차별이라는 죄악은 멈추지를 못합니다.
나는 아시안입니다.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은 조금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안들에게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종차별이 미국역사에 뿌리가 깊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특별히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은 백인만이 아니라 유색인종들, 나아가서 아시안 스스로도 함부로 쉽게 합니다. 약하게 보여서 그런지 이에 항거하고 투쟁하지를 않아서 그런지 만만하게 보는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이 존재합니다. 몇년 전에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모임에 갈 때 항상 안타까운 것은 아시안들의 얼굴은 잘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서류미비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위에 참가할 때도 느끼는 것인데 아시안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그러니 이번 미네소타에서 죠지 플로이드가 죽어갈 때 백인경찰이 목을 누르고, 동양인 경찰은 그를 보호하느라 긴장해 있는 사진이 언론에 올라온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미국에 이민와서 인종차별을 당연시 하고 구조적인 악을 정당화 하는 기득권자들의 평안과 편리를 우리도 누리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한다면 그런 꿈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꿈은 1963년 8월 28일 와싱톤 링컨 메모리얼 광장에서 외친 마틴 루터 킹목사의 그 꿈이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들이 숨을 마음껏 쉬게하라.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라고 이 성령강림절에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