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국에서는 아버지날이네요. 아버지의 마음은 어머니보다 더 여린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는 우리가 자랄 때 미국에 공부하러 가셨고 10년도 넘게 걸려 영주권 받아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랬는지 우리 삼형제에게 큰소리 한번 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로 밑 동생이 고등학생 때 친구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아 다리에 피가 흐르는 상태로 집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병원에 가자 하니 병원에 가면 친구가 잡혀간다고 못 간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이놈의 자식 그렇게 아버지 말 듣지 않으려면 나가라!”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고집 센 동생은 나가버렸고 10분 후 아버지는 저에게 나가자고 하시더니 짐승이 우는 울음소리를 내며 동생을 찾으셨습니다. 아파트 쓰레기통 뒤에서 울고있던 동생을 찾은 아버지는 “내가 잘못했다. 집에 가자”하시면서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생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습니다. 저는 뒤에서 아버지가 저렇게 마음이 약하니 앞으로 우리 집안 어찌 되려나 걱정을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런 마음이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는 그를 끌어안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동네사람들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면 자신을 통해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약의 하나님을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죄인을 구하러 오셨고 아픈 자를 고치러 오셨고 지극히 작은 자들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천하 귀한 존재인지 알게 하시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닮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이 밤에 늦게 들어오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새벽까지 술 마시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아파트 계단 오르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항상 문을 열어 주시면서 “늦었다. 들어가 자라”하셨습니다. 저에게 열쇠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러셨습니다. 저도 아이들 자랄 때 ‘absent father’(부재자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큰소리 잘 못합니다. 그리고 늘 미안하기 때문에 무리하게라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합니다.
어린시절, 어쩌면 에덴의 동산같은 그런 평온하면서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행복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저의 청소년기는 불안과 열등감이 컸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만난지 3년만에 설교하시다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그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했고 하나님은 나쁘고 잔인한 분이라며 원망하면서 교회를 떠났지만 오래 그러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사람은 크면 에덴 동산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무 잎으로 겨우 부끄러운 곳 가리는 신세이지만 광야를 헤쳐 나가면서 비로서 은혜가 무엇인지 십자가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아픔도 아브라함의 두려움도 야곱의 고달픔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겪어내는 것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나 무슨일이 있어도 감당해 내고 감사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니 세상 아무것도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알면서도 천하 만물 좋은 것은 다 내 것으로 여기며 삽니다. 삶의 한계를 절실히 이렇게 저렇게 체험하게 되어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믿음이 있으니 그 어느 것도 내가 예수를 예수가 나를 사랑하는 그것에서 떼어 놓지는 못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게 되니 바울이 말한 자족의 비결은 물론 가난한 심령을 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그냥 “아버지!” 한마디 하면 뭔가 모를 큰 힘이 몰려오고 은혜가 넘치고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