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팔레스타인 소녀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게 와서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대화를 합니다. 나는 내 보청기가 잘못되어 잘 안 들린다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와서는 청각장애(auditory challenged)가 있다고 하면서 아이가 “나 저 한국 할아버지에게 가서 인사해도 돼?” 하더니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수화는 머리 위에 두 손을 들어 사랑한다고 표시하는 것인지라 손을 들었다 놨다 열심히 하고 엄지와 검지로 사랑 표시를 하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 숙박은 모두 팔레스타인 자치령에서 했습니다. 가격이 저렴해서도 그렇겠지만 사람들이 친절합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만이 아니라 유대인 아이들도 우리 일행이 어디를 가나 손을 흔들어 주고 소리 내어 반겨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행가이드 목사님이 자기가 선교사 부모 따라 어린 시절 이스라엘에 와서 30여 년 살았는데 유대인들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척박하고 열악한 현실에서도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영적으로 아름다운 땅의 사람들’이라 합니다.
하나님 약속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지만 자연환경은 믿음으로 일구어 내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땅입니다. 저는 솔직히 인위적으로 ‘성지’라고 이름 붙인 곳들은 감동이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부모 기념교회’라든지 이런저런 제목을 붙인 성당에 들어가서 가이드 하는 분들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잘 들리지도 않고 줄 서서 들어갔다 나오는 것 재미없었습니다. 제게 감동은 유대 광야와 갈릴리호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도 감동이었습니다. 물을 찾기 어렵고 나무가 보이지 않는 광야와 사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여기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계속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은 이런 척박한 땅에서 영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과 미국처럼 자연환경 조건이 좋은 나라에 살면서 영적으로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어디를 가나 성경을 들고 계속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금요일 늦은 오후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에 식당에 가족들이 모여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들도 그랬습니다. 성지순례는 성경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신앙 배경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할 때가 많은데 알게 되면 존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으로 감리교 목사는 나 외에 한 사람도 없이 타 교단 목사님들과 9일이라는 긴 시간 지내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만이 아니라 총과 칼만 없는 것이지 개신교 내부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솔직하게 그동안 저는 보다 진보성향이 강한 연합장로교단 목사님들과 교제는 많았지만, 보수 장로교단 목사님들과는 거의 만나는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좋았습니다. 어느 사모님은 제가 간다는 것을 알고 머리에 뿔 난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라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간증도 합니다. WCC나 가톨릭에 관한 신학적 차이는 물론이고 한국 정치를 보는 시각이 다른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같이 지내면서 보니 영적으로 아름다운 신실하고 좋은 분들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차이점을 극대화해서 문제 삼으면 어디에서 누구라도 공존할 수 없지만 공통점을 귀하게 여기면 주님의 일을 위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Free Chul Soo Lee’(이철수에게 자유를!)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아시안 인종차별의 전형적인 케이스였기에 이철수를 살려내기 위해 한인들 뿐만이 아니라 일본계와 중국계를 포함한 아시안들이 연합해서 사람 살리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했던 기억이 살아났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정의와 평화 실현을 위한 일에 더욱 연합해야 할 필요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주님의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요즘 안타까운 것이 교단 분리 현실에서 자기 세 확장과 정당화 작업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대화’니 ‘정의와 평화’니 좋은 말 탁월하게 잘하던 교단에 함께 있었는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모습보다 부끄러운 모습이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미워하고 파괴하는 길이 아닌 다르게 사는 예수님의 길을 교회가 선택해야 하는데 세상의 갈등 문화에 쉽게 동조합니다. ‘말의 세 황금률(Golden Rule)’이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실인가?(Is it true?) 이것이 친절한 말인가?(Is it kind?) 이것이 필요한 말인가?(Is it necessary?) 무엇보다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언행의 훈련이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어떤 삶의 현실에서도 우리 모두 영적인 아름다움을 지켜 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