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80년대 초반 보스톤한인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하던 스님이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저보다 연배도 높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라서 하버드대학 근처 교회 어른 목사님께 가시라고 했더니 무슨 이유인지 저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셨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일 년간 안식년을 가신 동안 제가 임시 담임이었기에 그리 했습니다. 세례 받는 날 부탁이 있다고 하시면서 “목사님, 저는 머리에 물을 넉넉하게 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손에 가득 담아 머리에 붓고 세례식을 했습니다.
그 이후 보스턴 지역 교역자 모임에 가끔 오셨습니다. 어느 목사가 당시 한국 아주 큰 교회를 대단하게 높이는 말을 하니까 그분이 갑자기 “가을바람에 새털입니다” 합니다. 하늘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인들 뭐가 대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신학생과 목사들이 예수 진리에 관심가지지 못하고 세상 헛것을 부러워하냐고 꾸짖었습니다. 요즘 가끔 그분 생각이 납니다.
지난 한 주간 새벽기도 본문이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하셨고 서머나 교회에는 어려움과 배고픔을 믿음으로 잘 이겼으니 진짜 부요한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에게는 예수 이름 굳게 잡고 세상 유혹이기라 하셨고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의 근본을 회복하라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고 착각하지만 죽었으니 다시 깨어나라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큰 믿음 지켰다고 칭찬하셨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토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교인들은 돈이 많아 먹고 살기 편하니 영적인 갈망이 없고 교회는 돈 많이 들여 자기 과시하는 행사 가득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런 교회였던 것입니다.
40여 년 전 곽노순 목사님께 “어느 목사가 신문에 저에 대한 글을 썼는데 저에게 유리한 내용인지 불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유리와 불리를 따지지 말고 진리에만 관심 가져라” 하셨습니다. 요즘 동네 돌아가는 것 보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 채우려는 사람들이 설쳐대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내용상으로는 별것이 없으면서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자기과시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 자기가 잘해야 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몰려다니면서 집단 속에서 자기만족을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얼마 전에 어느 젊은 목사가 “나는 교단을 사랑합니다” 라는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오랜 친분이 있는 흑인 목사가 교단분리 사태 이후에 코리언들이 두드러지게 교단 사랑 발언과 충성 맹세를 많이 하는데 왜 그러냐 묻습니다. 정말 왜 그럴까요?
유리와 불리의 관심이 아니라 믿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는 주의 종들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진정 교회가 사는 길은 예수 사랑의 회복과 복음 증거의 열정입니다.
제가 요즘 아침에 걷는 공원에 겨울을 지내러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고 호숫가에 머문 거위들의 배설물이 즐비합니다. 가을 바람 새털은 허망하지만 새 똥은 더럽습니다. 자기 갈 길을 가지 않고 목적을 상실한 거위처럼 우리 신앙생활도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이 후러싱제일교회에 편지를 보내신다면 뭐라 말씀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