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 첫 주 토요일은 ‘약속의 땅’ 교회 묘지에 가서 합동 추모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후 최권사님이 남편 묘지에 뭘 붓기에 뭐냐 여쭈었더니 생전에 남편께서 커피를 좋아하셨기에 커피 맛있게 끓여왔다 합니다. 저는 오래 전 아버지 산소에 가면 소주를 부었습니다. 아버지는 목회를 하시면서도 가끔 서재 문을 잠그시고 맥주를 드셨습니다. 저는 술을 드시는 아버지에게 목사가 왜 술을 마시냐고 대들었습니다. 서재 문을 잠그시고 술 드시는 날은 평양에서 홀로 월남하신 후 부모님 생각날 때 그러셨다는 것을 나중에 돌아가신 후 아버지 일기를 보고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홀로 감내하셔야 하는 아픔과 외로움을 우리는 어려서 알지 못했습니다.
김권사님이 남편 묘지 앞에 계시는데 제가 무슨 생각에 빠져 지나쳤더니 “목사님 우리 남편 보지도 않고 그냥 가세요!” 합니다. 제가 “아이고 지금도 가끔 눈 감으면 남편 권사님 주일예배 후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으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했습니다. 주일이면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큰 소리로 반기시면서 내 손을 잡고 흔드셨던 권사님입니다. 내가 뉴욕에 온 지 1년여 지나 세상 떠나셨지만 따님이 애틀랜타 내가 목회하던 교인이었기에 남달리 나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20대에 떠난 딸, 30대 40대 떠난 아들들, 중년에 노년에 보낸 남편과 아내, 90세 100세 노년에 떠난 부모님들… 모두 다 그리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합동 추모예배 드릴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언제인가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여기에 교인들이 편하게 쉬면서 지내다 갈 정자를 하나 세우면 좋겠습니다” 하기에 “아니 빨리 예배드리고 가야지 뭘 묘지에 오래 있으면서 편하게 쉬다가 가요?”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이 섭섭한 눈으로 나를 보시더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요…”합니다.
뉴욕 북쪽에 있는 부루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거기 멤버인 박성훈 형제가 저에게 “목사님,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곳을 보여드릴게요”하면서 데리고 간 곳이 공동묘지였습니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묘지에 모신 분들에 대한 사진과 삶의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중요한 회의를 할 때 그 묘지에서 하고 결혼식도 묘지에서 한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곳이고 공동체 모두가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 분들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제가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 교회 한어회중 창립하신 김병서 목사님이 금강산 식당에서 냉면 하자고 해서 뵈었습니다. 냉면을 드시고 목사님이 어렵게 부탁을 하십니다. “김목사가 나 죽으면 장례 해줘. 그래도 나처럼 고향 잃은 사람 마음 김목사가 잘 이해할 것 같아서 그래.” 한 달 전에 김목사님이 이사 가신 주소를 보내셨는데 지난주에도 또 보내셨습니다. 잊지 말아 달라는 마음이시라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 교회 어느 모임에서 교회 묘지 몇 개를 담임목사를 위해 지정하겠다고 하기에 아내에게 말했더니 목사 죽은 다음에 싫어하던 교인들이 교회 묘지에 와서 불편할지 모르니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말이 되기에 없는 것으로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죽어 누울 자리 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 누울지는 몰라도 어디로 갈 것인지는 분명할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죽음 이후를 두려워한 적 없습니다. 예수 믿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나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이 언제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한 일도 저런 못난 일도 많았지만, 그거와 아무 상관 없이 나의 구원은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믿음으로 삽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 11:25-26) 물으셨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믿었으니 이거 하나는 분명히 건진 것 같습니다.
어제 참 좋았습니다. 가깝지 않은 길이고 주일 준비는 물론 구역회 준비로도 바쁜 날이었지만 먼저 세상 떠난 교인 사랑하는 가족들을 함께 추모할 수 있어 좋았고 날이 참 좋아 더욱 그랬습니다. ‘약속의 땅’ 참 잘 마련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