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역사가들은 기독교가 4세기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시작한 국교화 작업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가졌던 하나님 나라운동이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종교시스템화가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고난과 순교의 역사속에서 부흥을 하지만 ‘제국’을 지켜내는 도구가 될때에는 예수가 교회의 주인됨을 포기했습니다. 로마제국만이 아니라 중세기 유럽의 제국들도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 신부들과 선교사들을 앞세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히틀러 나치 당시 ‘독일교회’는 나치정권 애국주의와 반유대인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나 본 회퍼목사와 같은 분들이 바르멘선언(고백교회)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할 것을 선언하고 나치정권에 항거한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교회는 일제 강점 아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6.25전쟁 이후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부활 소망의 메세지를 소신껏 전했습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인권과 사회정의 중심에 섰고 교회는 억울함당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친구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인정받고 신뢰받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교회가 부흥의 절정기를 이루는 듯했으나 교세가 급격히 감소하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는 현상은 교회가 교회의 자기역할을 잃어버림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신과 동일시하신 ‘지극히 작은자들’에게 아버지 마음, 어머니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황제’를 신격화 하고 ‘제국’을 유지하는 도구가 되어버리면 교회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애국주의입니다. 왜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같이 존재했을까요?

역사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죄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한반도평화의 물꼬가 열리게 된 공적을 트럼프에게 많이 돌리고 있기는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가장 많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애국주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백인 민족주의가 항상 같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교회들은 어디에 서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백교회의 지도자들은 나치 애국주의에 항거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들도 고백교회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한다는 선언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는 항상 약자와 억울함 당한자 편에 서셨고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옛날 의정부에서 어머니가 서울대 약대 출신 이모님의 약사자격증을 가지고 민생약국을 운영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젊은여자들이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러 와서는 한참이나 엉엉 울다가 갔습니다. 어머니는 같이 우셨습니다. 내 어린시절 이모부 전처의 아들이 저녁이되면 우리집에 울면서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형 손을 잡고 이모에게 가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너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어찌 이러냐?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 모질게 이 불쌍한 것을 구박하고 그러냐? 너 그러면 벌 받는다.” 그러면 이모는 “언니, 나도 이러면 안되는 것 아는데 남의 자식 사랑하는거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하면서 엉엉 울고는 했습니다. 훗날 이모는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평생 모았던 땅을 자기가 낳지 않은 아들들에게 모두 나누어줬습니다. 그 형들은 지금도 이모를 자기 친어머니처럼 모십니다.

며칠 전 뉴욕 부르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한 박인환목사님이 페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구경했다.”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지만 부르더호프 공동체 분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3일 동안 아버지 마음과 어머니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진정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