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80년대 청년목회를 하면서 설교에 자주 인용했던 롤로메이(Rollo May)가 말한 “옛 것은 다 지나가지 않았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때에 필요한 것은 창조하는 용기다(Courage To Create)”와 폴틸리히(Paul Tillich)의 “어떤 유혹과 협박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용기(Courage To Be)가 믿음이다”를 많이 생각합니다. 목회 말년에 존재와 창조의 용기가 이렇게 절실하게 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김소월 시인이 깨달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이제금 저 달이 설음인 줄은…예전에 미처 몰랐어요”가 마음을 맴도는 일이 많습니다. 달도 쳐다 볼 줄 몰랐다고 고백한 시인의 아쉬움과 아픔이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잘 모르던 어린 나이에 연합감리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보스톤한인교회에서 철저한 장로교 칼빈주의자이시면서 종교개혁 시대 마틴 루터가 아니라 토마스 뮨처의 영향을 받은 에르네스트 블로흐(Ernst Bloch)를 공부하신 홍근수 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웠습니다. 항상 홍목사님은 “진정한 크리스천은 철저하게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철저하게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80년대는 신학만이 아니라 어떤 학문이라도 시대의 역사 변혁과 긴밀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진지하고 치열하게 사는 감동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 존경과 동지 의리가 무척 깊었습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깝게 지난 오늘날 사회주의 이상을 꿈꾼 나라들이 보여준 열매는 설익거나 썩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란 것도 객관성을 공유하기에 불가능한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90년대 후반 시카고 연회에 새로 온 감독이 저를 당시 좀 큰 교회에 파송을 했지만 파송거부를 당했습니다. 감독이 파송을 거부하는 교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저를 처음에는 감리사로 세우겠다 하다가 나중에는 큰 미국인 교회로 보낸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가 “교회에서는 파송 거부를 당했으면서 감리사를 시켜준다고 좋아하는 당신이 실망스럽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안팎이 장로교 목사 집안인지라 감리사나 감독 이런 것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고, 목사는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시카고에 있으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목사가 될 것 같아 애틀란타에 목회 자리가 생겨 급하게 떠났습니다. 그때 부터 저는 내가 목회 바닥을 지켜내지 못하면 남에 의해서 내 인생이 좌지우지 당하게 된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고 정말 열심히 목회해서 이민교회 가운데 나름대로의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18년 목회를 하고 뉴욕에 온지 햇수로 8년이 됩니다.
목사가 된지 41년이 넘었습니다. 언제 은퇴를 해도 어려움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교단에 남겠다는 진보진영의 후배들은 “목사님은 원래 진보이니 마음에 따라 자유하세요”합니다. 교단을 나가겠다는 보수진영의 후배들은 “원래 보수이니 우리 한인교회를 지켜주세요” 합니다. 그런데 목회현장에는 원래 진보 원래 보수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 가르침 따라 실천에서 진보를 이루어야 하고 시대 어떤 변화에도 불변하는 복음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신앙의 보수이어야 합니다. 그 어느때보다 창조하는 용기와 존재하는 용기가 절실합니다. 그러나 목회 말년에 이른 저로서는 그런 용기가 부족합니다.
동성애자 목사안수 논쟁으로 인해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는 교회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은 물론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나가려고 합니다. 그만큼 역량이 되는 교회들이기 때문입니다. 남겠다는 교회들 가운데도 역시 신앙적 양심을 따라 그리할 것이지만 많은 교회들은 나갈 역량이 어려운 교회들이니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제게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향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지키십니다. 그러니 어제 새벽기도 본문 말씀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결정의 판단 잣대는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이어야 하고 어떤 일도 예수 잘 믿고 예배 잘드리기 위한 것이어야지 몰려다니면서 밥 사주는 사람 편에 서는 세상 패거리 정치하는 것처럼 그래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교단과의 관계에서 어떤 결정을 한다고 해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에는 하나님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교회 주인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