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밤이 다른 날들과 어떻게 다른가요?”(How is this night different from all other nights?) 유월절 식사(Seder) 시간에 가장 어린 아이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들은 가장 큰 어른이 그 아이에게 대답합니다. 유월절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셨는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아주 멀리는 일본과 태국등을 강타했던 쓰나미와 아이티 지진이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미국의 북가주 지진, 뉴올리언즈 카트리나 홍수 등 엄청난 피해를 준 자연재해가 있었습니다. 뉴욕은 2001년도에 9.11 테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확산에서 지금은 우리가 사는 미국 뉴욕이 팬데믹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사상자의 숫자와 입원자들이 줄어가고 있어서 서서히 전면폐쇄(lockdown)를 풀고 사업체들을 여는 주들이 늘어나고 있고, 미국 여러 곳에서 경제 살리기를 위해 제재를 풀어야 한다는 데모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코로나 전염병이라는 것이 지진도, 쓰나미도, 대화재도 아닙니다. 직접 당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뉴스를 통해서나 알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재해와 비교할 수 없는 수 십만의 인명 피해와 경제적인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뉴욕은 장례를 치루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과 경제문제로 인한 피해가 큽니다.

지난 주간 저에게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아버지 하관예배에 자신도 코로나 양성판정이 나와 참석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몸도 견디기 힘든데 마음은 더 아프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해서는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라는 부탁이 강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코로나는 바이러스입니다.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떠나신 분들은 물론 가족들 그리고 ‘확진자’가 되신 분들 누구에게도 실제 아픔보다 더 아프게 하는 언행은 없어야 합니다.

한국은 지난주 부터 확진자가 없다고 합니다. 미국도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날이 풀리고 사람들이 긴장을 풀기 시작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글을 누가 SNS에 올렸습니다. “노아가 자기 믿음 좋다는 것 증명한다고 홍수 때 방주에서 나가 수영하지 않았다. 그는 방주안에 거하면서 안전할 때가 오기까지 기다림으로 믿음을 지켰다”(Noah didn’t go swimming in the flood to prove his faith in God. He showed his faith by staying in the ark and waiting until it was safe to come out) 특별한 일 아니면 다니지 말아야 하고,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손을 비누로 잘 닦아야 하고, 마스크 반드시 쓰고 다녀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아주 특별한 일 아니면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오겠다는 사람들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나는 목사로서 내 몸 잘 지키는 것이 교회를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도 모두 자기 몸 잘 지키시기를 바래서입니다. 지금은 자기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시험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라가 정한 ‘필수적인 일’ 하는 분들은 정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안전과 위생수칙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언젠가 우리의 ‘유월절 식사’의 때에 가장 어린 아이가 “오늘 우리의 이날이 다른 모든 날들과 어떻게 다른가요?”라며 질문할 것이고 어른된 우리는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코로나로 인해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생업에 큰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가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 우리 자신들에게는 물론 자녀 후 손들에게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살려주신 이야기는 말할 것 없고, 아픔과 죽음의 현실속에서도 믿음지킨 신앙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