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예배당 문이 닫히는 사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경험이고 앞으로 예배당 문이 열린다고 해도 여러면에서 교회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전쟁이 있어도 교회는 필수적인 곳이고, 고난과 환란의 때 일수록 교회 만큼은 열려져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얻어야 하는 곳이고 세상 그 어느것 보다 필수적인 곳인데, 화창한 봄날씨가 시작되는 계절에 뉴욕에 있는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교회의 ‘필수적인 것’(essential)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교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제사 중심에서 디아스포라 2,000년 온 세계로 흩어지는 역사를 통해 회당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은 가정이 신앙의 중심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가정 신앙의 핵심은 안식일 기도로 시작하는 식사와 14살이 되면 모세 오경을 암송함으로 ‘말씀의 아들, 딸’이 되는 신앙의 성인식 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 순교 이후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머무를 수가 없어 사마리아와 이방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역사, 이방 땅 안디옥에서 사도바울이 제자를 훈련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역사에서도 개혁을 위해 내세운 구호가 ‘Ad Fontes’(Back to the Sources) ‘근원으로 돌아가자’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여기에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 나온 것입니다.

교회 본질 회복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교인들이 어디에 있어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전도와 선교적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지금처럼 가정에서 예배드려야 하는 때를 생각하면서 목회실은 성경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필수 성경구절 50개와 찬송가 50개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도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나누고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위해서 입니다. 지금처럼 집에 갖혀 있어야 하는 상황을 오히려 자녀들과 함께 성경구절을 외우고 찬송을 배우는 시간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당이 다시 열렸을 때 찬송가가 없어도 PPT 자막을 올리지 않아도 찬송을 외워서 부를 수 있고, 성경도 암송으로 외칠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감리교는 평신도 신앙운동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연회나 총회 회의 때 투표를 평신도와 목사 한 표씩 동등하게 하는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포함한 신앙생활 전반의 리더쉽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의 ’일’을 신학공부를 한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평신도 신앙운동으로 시작된 교단의 목사들이 가톨릭 사제들이 입는 것 같은 옷을 입는 것으로 ’성직’을 구별하려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그리고 교단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교인들의 삶의 자리가 너무 거리가 멉니다. 그러다 보니 회의 전문가들이 교단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의 기득권을 독점합니다. 이렇게 현장 중심이 아니라 행정중심 제도적 교회로서는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초대교회는 흩어져서 제자훈련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게 되었고, 초대 감리교 운동 ‘순회사역자’(circuit rider)들은 ‘홀로 해내는 개척정신’(independent frontier mentality)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을 암송하듯 신앙의 핵심을 암송하고 영적전투 현장에 투입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타고 여기저기 다니며 전도하여 감리교운동이 불일듯 부흥했던 원동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중에 교인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예배를 생활화 하다가 주일이 되면 세상에서 살면서 경험한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부활의 승리 이야기들을 하나님께 축제로 올려드리는 교회 공동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와 같은 전문사역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나가 영적전투에 임해야 할 교인들에게 최고의 영적무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회복의 기간이 짧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복은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도 변하겠지만, 교회도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변화의 목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감리교운동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