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가 세상 죄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구원은 어둠의 삶에서 빛, 전쟁에서 평화, 정죄에서 은혜, 미움에서 사랑, 절망에서 소망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 아기 예수는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헬라어 ‘kenosis’(키노시스)는 자기 비움을 뜻합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 예수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겸손케 되심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겸손케 되심으로 진정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았던 로마군대는 말을 타고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는 마굿간 말 밥통 위에 놓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아기에 대해 어느 로마 병사의 사생아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냥 착하기만 해서 그런 아이를 자기 아들 삼아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했고,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여인이고 바로 그 예수가 인류 구원 메시아 그리스도라 증거합니다. 왕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뀐다해도 말타고 다니는 사람들만 신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도우심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이루는 구원이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에게 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문제를 사람들이 사는 세상 바닥에서 부터 이루셨습니다. 땅의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하나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아픈 사람 있으면 고쳐주고 비천하게 여김받고 버림받은 사람들 만나서 하나님 사랑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자화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며칠 전 큐티 시간인데 하나님이 기도를 너무 오래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에 대한 문제제기를 누군가 합니다. 내가 목사이니까 뭔가 답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치는 시간에 어느 분이 노래 하나를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문제를 제기한 교인에게 들어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다른 몇 사람도 그 노래 참 좋다고 권면을 합니다. 그 다음날 들려오는 소식이 하나님 문제를 제기한 교인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여주고 마음 나눔 속에 예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제국 영향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고, 바리새인들은 민족 주권회복을 위한 애국의 명목으로 땅의 사람들 정죄하는 일에 집착이 되어 있을 때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치유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정말 예수님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잘난 사람들은 너무 자기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말구유 아기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만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성탄의 계절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은 사랑의 나눔과 ‘키노시스’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나눔에는 ‘키노시스’ 자기 비움의 겸손이 요구됩니다.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선교지에 있는 어느 교회가 어려워서 성탄절 아이들 선물주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이 자기가 다 내겠다고 하면서 무명으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왜 무명으로 해달라 했을까? 제가 보니 일년 내내 자기 잘사는 일에 바쁘고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잘한 일 없는데, 연말에 갑자기 좋은 일 했다고 자기를 드러내면 하나님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저는 했습니다. 내 자식인지라 그 마음을 제가 그리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도 ‘키노시스’입니다. 자기의 선함과 의로움에 대해 너무 당당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자리에 들판에서 밤을 새던 목자들이 찾아와서 그냥 함께 있었습니다. 노래도 잘 못했는지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수 부모도 인생 부족한 것이 많아 자신이 없었는지 아무 말도 없고 아무 것도 못하고 찾아온 목자들과 함께 가만히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못나고 모자라는 사람들이지만 그냥 함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 잔인한 팬데믹으로 세상은 정말 아프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겸허하게 사랑 나누기를 주님은 바라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