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 초에 출판된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살까?”(김정대신부)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국 사회는 ‘남자다움’에 대한 환상이 확고하다….강요된 남자다움과 가부장 체제가 결합하면서 굴레를 만들고, 남자들은 그 속에 갇혀 힘겨워한다. 하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슬픔도, 아픔도, 힘겨움도 드러내면 안된다. 그렇게 강요 받은 남성의 삶은 겉으로는 강해 보일지 모르나 대단히 위태롭다… 왜 한국 남자들을 그렇게 사서 고생하고 불행을 자초하는 걸까? 그런 거 좀 내려놓고 편하게 살면 안 될까?” 그 책의 결론은 ‘만들어진’ 남자에서 ‘나다움’으로 살아가는 남자가 되라고 합니다.
20세기 대표적 신학자 폴 틸리히는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용기(Courage To Be)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나’가 되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교회력 설교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인생이 행복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못나게 사는 이유는 자기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피리소리에 춤추고 행복하게 살기도 바쁩니다. 인생 진짜 제대로 된 멋있는 본 게임을 살기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남의 이야기나 하고 한번도 제대로 진짜 인생 살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인생일까요.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그 자리가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면 같이 들어와 먹으면 되는데 바깥에서 비난이나 하고 있는 인생은 불행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예수님이 함께하실 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난 사람들 병이 고쳐지고 악한 귀신이 물러나고 무엇보다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라는 자기 발견을 합니다. 거룩한 존재 혁명이 일어나니 거룩한 삶의 사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예수님을 만나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불만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믿음대로 된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 나라(희년의 역사)가 임했다고 하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80년대 젊은이들이 많이 불렀던 ‘춤의 왕’ 노래가 후렴이 이렇습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세례 요한이 보낸 제자에게 예수님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희년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의미 없는 질문만 계속 던지거나 실족하는 자들 불행하다 하셨습니다(마태 11:5-6).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기쁜 소식’의 현실을 계속 부인하고 방해한 바리새인들 날이 갈수록 불만과 불행이 가득했습니다. 그냥 함께 기뻐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불행한 것에 집착했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지를 못하고 불행하기로 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춤을 추면 되는데 그것을 못합니다.
지난 주 교단 분리 후 미래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가 쓴 내용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갈라질 때 항상 예수(Jesus)와 그리스도(Christ)로 갈라졌다. 예감(예수교대한감리회)과 기감(기독교대한감리회)이 그랬고 기장과 예장, 예성과 기성이 그랬다… 우리는 글로벌과 연합으로 갈라졌다… 나간 교회들은 나가서 알아서 잘 할 것이다… 남아있는 교회들이 관건이다. 남아서 뭘 지킬 것이고 뭘 포기할 것인가 잘 판단해야 한다… 연합감리교회 어려운 때에 숫자는 소수이지만 영적인 다수로서의 거룩한 자화상과 자존감을 가지고 교단의 아픔을 끌어안아야 한다. 남아서 분열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한인들끼리 따로 섬나라를 세우려는 생각을 한다면 지질한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행복도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어떤 현실에서도 사람들의 헛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시는 피리 소리에 춤을 추어야 행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