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목회를 가르치신 어른들의 시대는 희생과 헌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의 세대는 그 어른들의 영향이 남아있어서 그래도 책임과 사명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배운 목회윤리의 기본 원칙은, 목사는 교인들이 풀어놓는 개인들의 문제를 품어내야 하지만 목회자는 자기 개인문제나 가족의 어려움을 교인들이나 교회에 부담을 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과 사를 잘 구별해야 하고 교회의 필요보다 자기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은 목사답지 않은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목사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사모로서 불리기를 원치 않으시고 권사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목사가 된 이후로는 부담을 주지않으시려고 항상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제가 목회하던 곳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오히려 덴버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로 가셨고 제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빠지지 않고 들으시는데 칭찬은 한마디 없으셨고 항상 “너는 왜 목사가 거짓말을 하느냐?” 아니면 “교만하지 말아라”등 주로 비판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제 설교 나오는 케이블을 없애라고까지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감사절날 어머니가 세상 떠나실 준비를 하신다고 해서 덴버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병원에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거부하셨고,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떠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집에서도 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을 불편해 하신다고 해서, 제 동생이 모든 돌보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거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전에 주변정리를 깨끗이 하셨다고 하면서 “엄마는 최선을 다해 잘 사셨어.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책임질테니 떠난 후는 알아서 해”라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으신 상자를 열어보니 고운 한복과 영정사진 그리고 봉투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장례를 집례하실 목사님에게 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주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아주 깨끗한 돈을 넣은 봉투였습니다. 어머니를 반나절 지켜드리고 다음날 아침 떠나려고 하니 동생이 저에게 한마디 합니다. “엄마 마지막 가는 것 보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냐?”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바쁜 것도 아닙니다. 담임목사가 몇 주 교회에 없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늘 그렇게 살아왔고 목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일 뿐입니다. 주일은 다른 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섬기는 교회에서 지켰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주일을 본 교회에서 지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 적도 없지만 저 스스로 그렇게 전제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장모님 장례예배 문상시간에 제가 교인들과 악수를 하며 평상시 주일날 예배 후에 하는 것처럼 그리했나봅니다. 몇 분들이 제가 울어야 하는데 웃으면서 악수를 했다고 뭐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직업병인가 봅니다.
떠나오면서 어머니에게 부탁했습니다. “엄마, 나 오늘 뉴욕가야 해. 가능하면 주일은 넘겨줘. 미안해.” 그 때, 숨을 가쁘게 쉬던 어머니가 그 순간 만큼은 평온하게 숨을 쉬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평소에 그러셨던 것처럼 “그래, 나는 걱정말아라. 너 바쁜데 빨리 가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남들 앞에서 제 칭찬을 하신 적이 없으셨지만, 제가 옆에서 효도하는 아들이기 보다 목회 잘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토요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기획위원회를 하면서 아무일 없는 듯 교회 살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단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의 장래 문제를 장로님들과 진지하게 대화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스텝회의 하면서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부목사들 야단치고 그랬습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내게 아무 일도 없는듯이 주어진 일을 하고있는 제 자신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마음 속 이야기를 이렇게 나누는 것도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다음 한 주간은 제가 덴버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