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임시 뉴욕연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2월 말 열렸던 ‘특별총회’에 대한 설명회 성격이었지만 Bickerton감독은 발표 시간의 95%를 총회 결정에 대한 비판으로 채웠습니다. 저는 감독 발표 도중에 참지를 못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챌 만큼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감독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특정한 안건을 지지하는 발언을 계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언도중 단 한 번도 박수치지 않았고 아멘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을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뉴욕연회 감독이라고 해도 쉽게 해결책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감독발언 도중 계속 한인목사들에게 발언의 문제를 지적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그래서만은 안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감독이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니 우리 한인 교회들이 방관자나 비판자로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 제기나 문제거리(a part of problem)가 되지말고 문제 해결에 쓰임받자(a part of solution)는 것입니다.
아틀란타에서 교인이 6,000명에 이르던 가장 큰 흑인UMC교회를 담임하다가 4년 전에 맨하탄에 와서 300명 목회를 하며 행복해 하는 친구목사가 있습니다. 어제 회의에서 만나 “감독이 제대로 하도록 네가 좀 발언을 해라”고 했더니 “지금은 서로 기다려 줘야 할 때” 라며 웃었습니다. ‘특별총회’에서 너무 전투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려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 말을 듣고는 저도 불만을 가졌던 감정을 조금 내려놓았습니다.
10여 년 전 어떤 큰 모임에서 제가 주제 발표하는 사람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비판의 칼이 녹슬지 않았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를 20대 초반부터 보았던 선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목사, 김 목사가 30대에 했던 역할을 50대에 들어와서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비판보다 품는 역할을 할 때다. 그러지마라.” 칭찬받을 줄 알았다가 엄청 민망했었습니다. 이제 60대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가끔 3-40대 날선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문제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나이값을 해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지 모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값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교단이 겪고 있는 진통의 과정에서 문제 해결의 한 부분을 감당하기보다 아직도 문제제기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노블리제 오블리제’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는 뜻과 같습니다. 뉴욕연회에서 후러싱제일교회에게 요구되는 것이 그와 같은 줄 압니다. 그렇지않아도 여러사람들이 저에게 감독을 만나서 할 말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할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더 빛나는 것처럼 교단이 어려울 때 우리가 진정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찌 담당할지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 박충구 교수가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지 말자”는 글을 썼더군요. 남의 잘못을 잘 들어내는 역할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오래 전 Robert Bly가 ‘어른은 없고 아이들끼리 싸우는 세상’(The Sibling Society)에서 “이 시대가 필요한 것은 곁눈질하는 사람이나 땅바닥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어른이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어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면 내 판단을 유보하고 품어낼 줄 아는 사랑의 역량이 커져야겠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고 길 잃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며 예수 사랑으로 품어주는 어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