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할 8가지 과오’라는 제목을 달아 장자(莊子)가 말하는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8가지 과오(過誤)를 적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조심해야 할 세 가지를 뽑아보았습니다. “1. 자기 할 일이 아닌데 덤비는 것은 ‘주착(做錯)’이라 한다. 2. 상대방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망령(妄靈)’ 이라 한다. 3.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말을 하는 것을 ‘푼수(分數)’라고 한다.”
얼마전 아멘넷에서 워싱톤중앙장로교회 류응렬목사님이 퀸즈한인교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설교에 대한 강의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설교자의 사명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고 하용조 목사가 시리즈 설교를 많이 했다. 군부독재 시대 때 대학생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죽어가고 있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시리즈 설교만 하고 있는가 라고 항의를 받았다. 그때 하용조 목사는 약간 극단적이지만 거룩하게 답변한 것이 책에 나온다. 하용조 목사는 “오늘 본문에 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굉장히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일면 그것이 설교자의 자세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은 필요하다. 설교자가 복음에 근거한 말씀을 바르게 던지면 된다. 설교자는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니 그 원리에 근거해서 각종 문화의 다양한 현상들을 파악하고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교인들의 몫이 될 수 있다.”
몇 년 전 ‘촛불혁명’의 때 유기성목사님이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성도들은 기도할 것이고 더욱 예수님 바라봐야 한다고 설교했다가 ‘촛불 지지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촛불들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광화문에 나가고, 교회에서 기도할 사람들은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적 위기의 때에 더욱 기도하고 예수 바라보자는 목사가 있는 것 나는 감사하게 여긴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고 하용조목사님이나 유기성목사님이 지키고자 하는 그 자리를 귀하게 여깁니다. 촛불시위에 나서는 목사들은 정의롭고 교회에서 기도하는 목사들은 비겁하다는 도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오래 전 제 스승이셨던 홍근수목사님이 의정부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무자비하게 죽임당했는데도 미군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을 항의하기 위해 한겨울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 금식하며 시위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주말에 후배 목사들이 “목사님 우리들도 홍 목사님 백악관 항의 시위에 동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니, 우리는 이번 주일 예배를 위해 설교 잘 준비하자.”라고 했더니 저를 비겁하다, 변절했다며 온갖 비난을 다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홍 목사님이 감당하셔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같은 목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내 몫은 이번 주일 예배 잘 준비하는 것이다.”였습니다.
저도 80년대 군사독재시절, 민주운동하는 어른들 간 다툼으로 인해 30초반의 나이임에도 ‘호헌철폐를 위한 북미성직자 단식투쟁대회’ 위원장직을 맡게 된 적이 있습니다. 백악관과 국무성앞에서 6일동안 단식하며 시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시위가 끝나자마자 당시 비행기 탈 형편이 못되어 기차를 타고 시카고에 돌아가서 아주 작은 개척교회였지만 내 목회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주착, 망령, 푼수라는 것은 자기 위치와 자리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목회하는 목사가 지켜야 할 자리는 주어진 목회지가 우선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 웨슬리가 “나는 세계를 교구로 여긴다.”라고 외친 것은 시장바닥이나 탄광촌이나 복음이 필요한 곳에 가서 설교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회지는 중요하지 않고 교단일이나 사회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 절대 아닙니다. 아니면 목회를 그만두고 그런 일 잘하면 탓할 것 없습니다.
요즘 “목사님 이제 보수로 전향하셨다면서요.” 질문 또는 시비조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보수였고 항상 진보였습니다. 신앙은 보수 복음주의 이고 실천은 열린 진보이기를 바라면서 목회를 합니다. 나는 내 길 갈 뿐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주착과 푼수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