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은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 기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도종환은 ‘가을비’에서 인생의 지나감에 대한 아픔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시가 좋은 것은 진실에 대한 예민함과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절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시를 만나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잃었던 진실과 아름다움을 찾는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가끔 심호흡을 합니다. 가을의 싱그러운 바람을 내 몸 속에 맴돌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길과 진리, 생명이 예수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말도 안 되는 말과 생각이 없는 생각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과 관계없는 열심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유아적 언어와 유치한 몸짓이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심호흡을 해서 좋은 바람을 들어 마시고 탁한 것을 몸과 마음에서 밖으로 잘 내보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을 잘 늙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집니다. 소노 아야코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는 책에서 노년(老年) 또는 만년(晩年)에 있어서 필요한 네 가지를 허용(許容), 납득(納得), 단념(斷念), 그리고 회귀(回歸)라고 썼습니다. 허용이란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납득은 삶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정성을 다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념이란 집착하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남으로 여유 있고 온화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회귀란 사후에 어디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녀가 노년이라는 단어보다 만년(晩年)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말에는 시적인 정적과 우아함이 풍겨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늙어감에 메말라감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보면 한 노파가 매일 어두운 밤이면 길가에 난 창가에 등불을 놓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위해 먼 길, 암흑 속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불빛, 등대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 세상 떠나신 시카고 임인식 장로님 생각이 납니다. 90세 넘어 사시는 동안 장로님은 새벽마다 미시간 호수에 나가셔서 금붕어 유치원이라 이름한 동네 노인들을 위한 체조모임을 이끄셨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이민 온 노인들이 모여 함께 운동하는 것에 대해 당시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조광동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다른 이민족끼리 새 땅을 밟고 새 하늘을 이고 넓은 호수를 펼쳐 놓고 어설픈 눈웃음으로 마음을 익히고 어설픈 언어들로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키워 온 세월은 사랑 많은 제 이의 정든 고향을 창조했으며 현재에도 호숫가의 전설을 가꾸고 있다. 이 분(임 장로님)이야 말로 볼 수 없는 한국의 외교관이었고 평화의 사절이요 사랑의 전도자였다.”
임장로님은 1980년대 시국관련 모임에 항상 제일 먼저 오셔서 앞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장로님, 힘드실텐데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하면 “김목사님, 나같은 늙은이가 이렇게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함부로 목사님에게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늙어서 아무 것도 못하지만 조국을 위한 일에 목사님 용기 잃지 말아요”하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도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중늙은이입니다. 잘 늙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