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경향신문,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동서양 여러분야 권위자들이 코로나 사태를 보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반복되는 단어가 ‘자연 파괴 경제’에서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경제, 글로벌에서 글로컬(지역중심세계화) 그리고 소비자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사회적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제시합니다. 과학자 이면서 ‘에코 페미니즘’의 사상가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란 엘리트의 머릿속에, 자본시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생계 속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 교회가 기도원/농장은 물론 도시텃밭 가꾸기를 통해 작게나마 이루려고 하는 뜻이 담겨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산물 생산은 물론 유통과정까지, 대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구조로 지역경제는 파괴되고, 사람들은 소비자가 되어 작아 졌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소비자로서의 역할만 하게 되면서 무기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느질도, 텃밭 가꾸기도 사람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구조에 대한 저항이면서 책임적인 존재로의 회복 운동인 것입니다.
제가 후러싱에 살면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잔디를 가꾸고 꽃을 키우기 보다는 한 뼘 땅을 온통 텃밭으로 만들어서 동네 스타일이 엉망이라’ 생각한 것을 반성했습니다. 중국의 농업경제 학자이면서 생태운동가 원톄쥔이 중국이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인구 절반 이상 농촌에 살아서 자립할 수 있는 생계가 가능했기에 고립을 선택하고도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동네 이웃들 텃밭 가꾸기에도 그런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고(ego centered world)에서 이코(ecological centered world)로의 전환은 결국 하나님 창조세계 돌봄의 책임자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소고기는 물론 식물성 고기도 이를 위한 GMO(유전자변형) 콩 재배를 위해 브라질 아마존 산림을 파괴하는 문제를 말하고, 농작물 씨앗도 몇 대기업에 의해 컨트롤 되고 결국 효율적 생산만 생각하다가 환경파괴를 넘어 농부들도 대기업이 제공하는 씨앗이 없으면 농사를 질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결국 실험실 음식과 가짜음식이 인간의 식생활을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년간 에볼라와 같은 새로운 질병 300여개가 대부분 산림이 파괴되면서 박쥐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들이 사람 사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생겨났다고 하니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환경파괴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채소 한 묶음을 가지러 롱아이랜드에 있는 어느 샌드위치 가게에 들렸습니다. 5에이커 밖에 안되는 유기농을 재배하는 농장 멤버쉽 가입을 하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려고 한 것입니다. 겨울에 멤버들이 가입비를 내면 여름과 가을에 멤버 상점들을 통해 픽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영리목적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자본투자. 생산과 유통 과정에 참여해서 유기농 채소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농장의 미래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뉴욕연회 어느 교회에서 ‘Blessing Box’(축복의 나눔 상자)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교회 주차장 큰 박스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Take what you need. Leave what you can. Above all be blessed.”(필요한대로 가지고 가세요. 할 수 있는대로 가져오세요. 모두 축복받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도 농장이 발전하면 나눔의 기회가 될 것이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교회가 나눔 축복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식품과 생필품 나눔만이 아니라 삶의 틀을 바꾸는 운동이 되면 과잉소비로 인한 환경파괴가 줄어들고 결국 코로나와 같은 질병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식품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는 대기업 중심에서 교회와 마을 공동체가 나름대로 주체적이고 책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톄쥔 교수는 노자의 ‘반자도지동’(되돌아 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고(ego)에서 이코(eco)는 하나님이 천지와 사람을 만드시고 “참 좋다”하신 그 하나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