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한다. 내가 나의 감옥 감방에서 나오기를 조용하게, 즐겁게, 확고하게, 그의 시골 집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역시 나에게 말한다. 내가 불행한 날들을 참아내기를 한결같이 웃으면서 당당하게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고…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내 스스로 아는 내가 오직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인가? 저런 사람인가?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인가? 나는 동시에 두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질문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가 누구 이든지, 당신은 아십니다.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며칠 전 어느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제 목회를 어떻게 정의를 내리느냐는 질문을 하기에 이리 말했습니다. “잘 모르면서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잘 하고 싶은데 벌써 40년 했네요” 제 답에 인터뷰하는 분이 당황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히려 제 설교가 깊이가 있고 좋고 뉴욕에 온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은데 느낌으로는 오랫동안 뉴욕을 지켜온 목사님이라고 치켜주셨습니다.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내가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나를 주님은 아십니다.
바울은 ‘나의 나됨은 하나님 은혜’(고전 15:10)라 했고,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23:10)라고 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자기를 모태에서부터 알았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허망한 것 찾아 인생 낭비하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자기를 만나고 참 평안을 찾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인생 행복의 비결이 있는데 때로 우리는 참이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았기고 마실수록 목마른 것 마시고 먹을 수록 채워지지 않는 것 먹으려 욕심을 부립니다. 하나님은 인생 절대절명 새 역사를 앞에 두고 얍복강가에서 씨름하던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고 예수님은 자기를 잃어버려 무덤 사이를 오가며 자기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던 젊은이에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어느 수필가는 “인생말년에 이르니 내가 나인 것이 참 좋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요즘 어설프지만 나의 나됨을 즐기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연속극 ‘나의 아저씨’ 에 “한번도 안아 본적이 없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홀로 집에 들어와 밥을 먹던 중년 남자가 목놓아 울고난 후 외롭게 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안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주님이 갈릴리로 가셔서 자기를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을 모두 만나주십니다. 베드로를 안아주시고 도마의 손을 잡아주시고 두려움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외쳐주셨습니다. 그들의 오늘과 미래를 자기들이 살았던 과거에 의해 규정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주권적으로 열어주시는 미래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목회하다 보면 정말 별 사람들 다 만나고, 별 일을 다 봅니다. 어제 목회스텝 회의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반응을 너무 빨리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지 않는 말을 듣는 훈련을 하자고요. 그래야 사람을 우리 눈과 마음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이 보는 눈과 마음으로 목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나 자신도 예수님이 그리 보아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나의 나됨이 가능 했으니까요.
평화는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나가 될 때 가장 행복하고 참 평화를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것으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