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 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사람을 영어로 ‘doubting Thomas’(의심하는 도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Inquiring mind)이나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통해 학문이 발전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설교학에서도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해서 거꾸로 보는 훈련을 합니다. 동쪽에 있는 사람은 서쪽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남자는 여자의 편에 서서 성경을 다각적으로 봄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살피는 것입니다. 목사 후보심사를 할 때 심사위원들에게 “당신 자신의 선입견을 점검하라”(Test your own assumption)는 말을 합니다. 심사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객관화하지 않으면 문화가 다르거나 삶의 현장이 다른 사람에 대해 부당하고 억울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좋은 의심이라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의심은 의도가 파괴적인 경우가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 중요시 되는 나라에서는 어떤 문제의 진실과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과정(process)과 과정을 잘 진행하기 위한 상호 합의(protocol)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미국 헌법은 ‘죄가 증명되기 전까지 무죄다’(presumption of innocence)라고 하는 것이고 형사재판에서 검사가 배심원에게 ‘의심이 없이 확실한 증거’(beyond reasonable doubt)를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움직이는 가치관도 그러합니다. 이것이 존중되지 않으면 억울함 당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 세계도 그렇고 교회도 자기들의 생각을 절대화 해서 자기 편을 선으로 반대편은 악으로 여기면서 프로세스와 프로토콜을 무시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어느 교단회의에서 동성애자 목사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현직 감독들에게 이 사안과 연관해서 교단을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의사표명을 밝히라는 편지를 보내는 안건을 내기에 저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강압적인 개인 자유 침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는 그와 반대편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역시 그런 못된 일을 생각하기에 목적이 고상할 수록 수단과 방법도 그리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인종차별도 그렇고, 어떤 나쁜 차별 바닥에도 자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한다고 여겨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을 하나님 뜻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이런 것 하나님이 싫어하는 자기 우상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기들이 절대적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일부러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사마리아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막 2:27)하셨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하셨습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 잡는 일 열심이지 말고 살리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도마를 찾으신 주님 이야기의 결론은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 20:28) 초대교회 신앙고백 기초 선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목적(purpose)이 있습니다. 어떤 프로세스와 프로토콜도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요즘 우리교회가 속한 교단 여기저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목적을 분명히 하고 프로세스와 프로토콜 정신이 분명한 지도자가 있는 동네는 교회들이 쉽게 흔들림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곳에는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억울함과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렵고 어지러운 현실에서 우리는 오직 부활하신 주님 만난 도마의 신앙고백을 드리는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