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분노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많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을 때와 안식일에 아픈 사람들 고치는 것을 율법 어긴 죄로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아픈 사람 고치려는 것을 안식일 법 어긴다고 고발하는 인간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오신 목적이 아픈 사람을 고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이기에 이것을 방해하는 것들에 분노 하셨습니다.
요즘 저는 가만히 있는 훈련과 생각을 단순화 하는 훈련을 많이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조용한 가운데 들려지거나 떠오르는 하나님 주시는 그 무엇을 기다립니다. 옛날 제 스승이 저에게 많이 하신 말씀이 “분주하고 많은 몸짓(motion)이 행함(action)은 아니다”와 노자의 ‘하지 않음으로 함’(Non-Doing)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를 너무 심각하게 신학적으로 분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제자들과 들판이나 호숫가에 놀러 다니시고 기회가 있으면 하나님 나라가 뭔지 가르치시고 아픈 사람들 보면 고쳐 주시고 못된 인간들 보면 화내시고 그리고 사람 차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겨하신 그것에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호되게 야단 맞은 적이 있는데, “이놈아! 젊은 놈이 진리에 관심 가지지 않고 뭔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생각하느냐?”였습니다.
며칠 전 인생 어려움 가운데 있는 후배에게 “살아있으면 사는 거다”라고 했더니 “목사님 멋있는 말 같은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당연한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라고 했더니 자기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대꾸를 안하더군요.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시고 사람 사는 곳에 계셨으니까요. 얼마 전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중요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불편하고 걱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뭔가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고는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좋았고 그 모임 끝나고 같이 밥 먹을 것 생각하면서 그랬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면 되니 그리 억지로 애쓰고 근심 걱정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일과 살리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뒤집어 엎으시고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로 화내고 뒤집어 엎고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 22:34-40) 하셨습니다. 그러니 법이니 예언자적 사명이니 시작과 끝은 사랑이고 사람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성전 정화 사건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으면 없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정화하려고 하기 전에 나를 정화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 예배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찾아서 고쳐야 합니다. 지난 주일 영어 예배 때 어느 분이 특송을 했는데, 큰 은혜받았습니다. 노래 제목이 ‘Come to Jesus’(예수께 오라)였는데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인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체험한 그것을 찬양으로 간증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예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