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집요하게 사마리아를 고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을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하는 ‘선한 인간’의 모델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병고침 받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문둥병자도 사마리아인이라 하셨습니다. 동네 여자들 입방아 거리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우물가 사마리아인 여자를 만나 참 예배에 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유다에서 갈릴리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오래 걸려도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 길을 일부러 들어가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한 4:4)를 저는 지리상의 편리함보다 예수님의 선교적 의도성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민족과 사마리아 민족은 가장 가까와야 하는데 가장 먼 동족입니다. 기원전 720년경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에 망하고 그 땅에 살아남아야 했던 무지랭이들이 앗수르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종교와 인종 혼합화 정책의 희생을 당했는데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반면 바벨론 포로 70년에서 돌아와 종교와 민족 순수성을 지켜냈던 남 유다는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500년 지난 유대민족의 분열역사의 현실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의 분노를 감수하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는 시대 터부시된 가치관을 뛰어넘으셨습니다. 동네사람들에게 더러운 여인으로 멸시당하던 사람과 대화를 나누심으로 자신의 제자들로 부터 의심의 눈총을 받으시면서도 그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결국 숨어 살던 그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새 인생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우리교회가 한어회중 창립 50주년을 생각하면서 ‘희년교회’가 되고자 하는 비전을 세우고자 합니다. 은혜를 선포하는 교회되는 것이고 눈먼자 눈이 열리고 억눌린자 해방과 자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땅에서 부활의 증인되기 위해 갈릴리 땅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야 한다는 중요한 메세지를 제시하십니다. 사랑이어야 하는데 미움이고 신뢰해야 하는데 불신의 대상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은 물론 교회가, 나아가서 민족공동체가 사랑과 생명의 새역사를 위해 만나야 하는 사마리아가 뭘까요? 저는 코로나 기간동안 소홀히했던 인간관계를 조금씩 회복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더니 100% 제 손을 잡아주더군요. 물론 아직 잘 정리되지 않는 마음의 앙금이 여기저기 적지않게 남아있지만 조금씩이라도 노력합니다. 목회를 생각하면서는 진정 예수님이 뜻하시는 목회에 보다 근접해 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4:18, 예수님 희년목회 선언이고 사마리아에 가서 미워하던 사람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미국 땅에서는 인종차별 세상을 인종화합으로 만들어가는 목회일 것이고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면 제국에 의해 분열되어 미움과 파괴의 대상으로 여겼던 동족을 다시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는 사명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 분리에 이르게 된 현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단순해지는 훈련을 하면서 목회도 예수 잘 믿는 교회 예배 잘 드리는 교회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말과 몸짓들 내려놓고 예수님 기뻐하시는 일에 열심인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