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지랄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많이 떠돌았습니다.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못나게 노는 짓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쩡하던 사람이 못된 짓 하기도 하고, 어려서는 안 그러던 아이가 고등학교 다니면서 부터 부모 속 썩이고 그러는 것이 다 자기가 채워야 할 ‘총량’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행복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고 사람마다 채워야 할 눈물도 웃음도 슬픔과 행복의 총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내 자신을 보면서 내가 60대 중반 중늙은이가 되어서 어린시절 채우지 못했던 것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아내가 잔소리의 차원을 넘어 꾸중에 경고까지 내리지만 야단 맞으면서도 계속 하는 짓이 있습니다.
요즘 가장 크게 경고를 당하는 것이 제가 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는 것입니다. 한동안 제가 가지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내던 것 중고품을 Goodwill 온라인 경매 싸이트에서 샀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10불이나 20불 내외입니다. 예수님 가시 면류관 쓰신 얼굴 나무 조각도 9불에 샀고, 소와 말 조각도 7불과 15불에 샀습니다. 내가 사는 물건들은 거의 모두가 소에 뿔이 하나 없던가, 말이 판에서 떨어진 것 등 어디인가 문제점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사려고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망가진 것 사서는 크레이지 글루로 붙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쇠로 만든 말이 발판에서 떨어진 것을 장로님 한 분이 용접소를 아신다고 하셔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망가진 말이 고쳐져서 돌아올 것 기다리는 마음이 기쁩니다. 제 변명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내가 원하는 것 사는것을 잘 못했습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뭐 사는 문화에서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들어서 가끔 이런 짓을 하는데, 내가 채워야 할 이런 짓 총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충만의 총량도 있고 기도응답의 총량도 있습니다. 요즘 감사한 것이 중보기도센터에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홀로 그리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코로나 이 어려운 때에 중보기도실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눈물 나도록 감사한 기도응답들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과 섬김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지난 일년반의 시간도 내게 채워져야 할 자기성찰과 점검의 기회여서 감사가 큽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설교에 많이 인용했지만 내 자신이 절실하게 경험하면서 하나님 사랑 예수님 십자가 은혜에 감사 또 감사가 가득합니다.
뉴욕에 살다보니 바다에 나가 맨발로 걸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그런데 걷고 돌아와 교회 마당에서 꽃에 물주는 호스로 발에 묻은 모래를 닦을 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민와서 쉬지않고 일을 했습니다. 별 일을 다 해 보았습니다. 술 도매상 냉장고에서 일을 했고, 페인트 잡, 지붕공사 심지어는 험한 동네에서 전단지 돌리는 일도 해봤습니다. 대학생 때는 UPS 물류창고에서 파트타임 밤일을 하면서 70년대 당시 시간당 $10을 받으니 돈 버는 재미로 공부를 엉망으로 해서 전공과목 F를 받아 졸업할 때까지 고생을 한 적도 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돈을 받아 살 형편이 아니었기에 고등학생때 부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이에 바닷가에 나가는 것은 물론 후러싱 동네 여기저기 이런저런 먹을 것 하나씩 사먹는 것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내게 채워져야 할 ‘동심의 행복 총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후러싱제일교회 목회를 ‘재래시장목회’라고 부목사 한 분이 이름 붙여줍니다. 너무 좋습니다. 고급 백화점은 사람 차별하지만 재래시장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장바닥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사람차별 없이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천국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언제인가 최불암씨가 나오는 연속극인데 힘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시장에 가서 친구들과 빈대떡과 순대 한접시에 막걸리 한잔 걸치면서 희노애락 함께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왠지 눈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많이들 힘들고 아픈 이 세상 우리 교회가 인간미가 있고 예수 함께하심의 행복이 가득한 천국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