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교회력 설교’(Lectionary Preaching)을 합니다. 교회력 설교 본문은 목사가 본문을 자의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3년 단위로 성경 전체를 본문 삼아 정해져 있습니다. 연합감리교회나 연합장로교회를 위시하여 연합회중교회, 루터란 등의 교회들은 대부분 교회력 중심 설교와 예배를 드립니다. 이 교단들은 주일학교 교재도 같이 만들고 교회의 공교회성을 중요하게 여겨서 에큐메니칼적 연합 활동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크리스챤돔’(Christiandom)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 지향적입니다.
이전에 주일학교 중고등부 영어권 목회자들과 함께 같은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했었습니다. 함께 준비하니 교회 공동체를 위해 다양한 각도와 경험에서 나오는 성경해석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 배운 설교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 이었습니다. 뒤집어서 보고 다각적으로 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눈과 마음의 해석을 참고해야 하고 백인은 흑인의 입장을, 기업가는 노동자의 현실을 파악하는 것처럼 설교도 그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설교학은 보스톤 저소득층 범죄가 많았던 지역Roxbury에 가서 그 동네 문제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교회력 설교를 하려는 것은 제 목회 말년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교회성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연합감리교회 목사는 파송을 받을 때 특정한 교회로만이 아니라 그 교회가 속해있는 커뮤니티를 위해 파송받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웨슬리가 외친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이 선언이 중요합니다. 웨슬리 시대 국교인 성공회 목사는 자기에게 정해진 강단에서만 설교하도록 제한되었는데, 그는 영국 산업혁명 시대 혼탁해진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증거하고자 시장바닥에서도 공장에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다 돌에 맞기도 하고 조롱당하기도 했고 교단에서 예배당 바깥에서 설교 못하도록 제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때 그가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온 세상 어디에서라도 설교하겠다고 외친 것입니다.
며칠 전 미 연방하원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 소식을 알리는 김동석 미국한인유권자 연대 KAGC대표의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 법안을 대표 발의한 아담 스미스 연방하원의원이 2019년 뉴욕에 왔을 때 저와 몇명의 목회자들이 함께 만났었기에 축하한다고 했더니 이렇게 답이 왔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2015년도 뉴욕 시민참여센터 모금에 교회 이름으로 선교비를 보냈을 때 그가 제게 한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지난 세월 우리가 하는 일에 어느 교회도 관심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교회가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후러싱제일교회가 처음입니다.”
감리교회의 사명은 예수 믿어 개인 구원받고 가정 천국 이루고 사회 구원 세상을 하나님 나라 만드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연대 연결을 통해 교회가 합력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워도 교단 선교비 100% 내는 것이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사회원칙’을 실천하는 노력을 합니다.
저는 설교를 하려고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이 있습니다. 4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같은 인간이 설교해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아파서 꿈틀거리는 저를 보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복음을 전하라. 필요하다면 말로도 하라.”고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개척교회 할 때 목사인 제가 너무 못나게 노니까 임원회장 하던 제 어릴 적 친구가 한마디 합니다. “오늘 설교 잘 했잖아. 그렇게 살면 안돼?” 그래서 “설교하는 것도 너무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살기까지 하니?” 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그러니 왜 철없는 나이에 목사가 되어 이 고생을 해. 너를 보는 나도 힘들다.” 했습니다. 세월 한참 지나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어렵네요.
설교는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열어주는 만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함께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