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정말 내 원수가 누구일까요? 어린시절 저는 원수가 분명했습니다. 잠을 잘 때면 호소력 있는 구성진 여자의 목소리로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전사한 강재구 소령같이 나라를 위해 생명 바치는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인천으로 수학여행 갔을 때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묵념을 하면서 이분이 예수님 다음으로 우리나라를 지켜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학생때까지 내게 영웅은 박정희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미국에 이민 와서도 “내 조국에 전쟁이 나면 나는 북한 공산당을 무찌르기 위해 한국에 돌아가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그랬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면서 내 영웅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폭력 인권투쟁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에 대해 배우게 되고 인권과 민주, 정의와 평화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되면서 케네디 대통령과 킹목사님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보스톤 신학교 1학년 말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이 터지면서 신학 공부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군사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이 뭔가를 배우게 되고 이 시대에도 뿌리깊은 제국주의적 만행과 신 식민지의 관계가 국가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그리고 제도권 교회 안에도 뿌리가 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생 시절 참으로 다양한 공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Howard Zinn의 ‘뒤집어 보는 미국 역사’, ‘김산의 아리랑’,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과 같은 책을 읽으며 역사를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독립운동의 어른이 이승만, 김구와 안창호만이 아니라 더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역사의식과 ‘영웅’이 달라지면서 나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할 때는 교회에서 문제가 없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면 공격하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막무가내인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맥아더 장군을 존경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까마라 주교(Dom Hélder Pessoa Câmara)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하게 되면서도 그랬습니다.
10여년 전 한국 감리교 대표적인 교회에서 열린 ‘세계 웨슬리언 지도자대회’에서 설교를 한 다음날 그 교회 장로들이 저를 만나자고 합니다. 아주 호의적인 대화가 이어지던 가운데 어느 장로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은 당연하고 김재준 목사까지는 괜찮지만 문익환은 아니죠.”합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 시대 교계에 어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세 분의 목사님 말씀을 한 것에 대한 그분의 평가였던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에게만 ‘님’자를 붙이고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서는 ‘목사’ 호칭도 부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 저와 대화를 하시려면 김재준 목사님이나 문익환 목사님이나 모두 목사님이라 하시면 좋겠습니다.” 했습니다. 그것이 대화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이후 나같은 사람은 한국 교회에 가서 목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김재준 목사님이나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을 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서로 ‘원수’됨의 골이 깊습니다.
엊그제 뉴욕연회에서 한인교회를 위한 교육용 비디오를 만든다고 해서 저는 그 가운데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를 주제로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교단의 분리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화’입니다. 토론을 통해 생각을 첨예하게 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공통점을 모색하는 작업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 우리들의 교단과 교회에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원수’만드는 일에 급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가 원수라고 여기는 내가 싫어하고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들이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살아오면서 어떤 때는 내가 나의 ‘원수’이고,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하셨을 때 나를 포함해 주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은혜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의 나됨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같은 ‘원수’를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복음을 믿으니 원수 사랑의 명령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