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뉴욕 주 버팔로 수퍼마켓에서 백인민족주의 음모론 신봉자인 백인청년이 총기난사를 해서 10명의 흑인이 죽었습니다. 도대체 이 백인 청년을 살인 악마로 만든 신념과 믿음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러시아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지난 3월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전쟁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서구세계에 가담하려고 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군대를 보내 구원해 내려는 것이기에 거룩한 전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전쟁의 정당화 도구로 만드는 믿음은 무엇에 근거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는 일에 열심이었던 과거에 대해 고백하면서 잘못된 진리에 근거한 신앙심이 특심이었다고 했습니다. 미국 인종차별 대표 집단인 KKK(Ku Klux Klan)를 정당화 시켜준 것이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사람 잡는 일로 악용하는 일들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합니다. 자기 생각을 신앙 확신으로 절대화 하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신학적 성향도 진보와 보수라는 틀을 만들어 가지고 모든 것을 그 틀에 들어가게 만들어 버리고 절대화 하는 못나고 못된 짓들을 합니다. 오늘날 세상 정치적 아젠다를 신앙과 신학으로 껍데기 덮고는 절대적 확신 가지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현실도 결국 이것입니다.
어느 분이 Sam Keen이 쓴 ‘적의 얼굴: 적대감의 심리학(1986)’ 서론에 나오는 글을 페북에 올렸습니다. “좌파와 우파 모두의 정치인들은 계속 뒤로 간다. 그들은 우리가 무기를 다르게 만들면 적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우리가 더 크고 좋은 무기를 가진다면, 적이 겁에 질려 공손해질 거라고 믿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작고 적은 무기를 가진다면, 적이 우리의 친구가 될 거라고 믿는다. …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가슴의 완악함에 있다…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최상의 희망은 적과 전쟁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은 하나님 말씀 아래 서야 하는데 말씀 위에 서는게 문제입니다. 절대적 가치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람은 겸허하게 그 뜻을 삶 속에서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확실하게 보여주실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부활을 믿는 믿음만 확실한 것이지 다른 것들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 의지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래서 계속 내 뜻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더도 덜도 아니고 다른 것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간구하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달을 봐야 하는데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우둔함에 대해 말합니다. 결국 제자들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가락을 짤라 버린 선승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과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셨을 때 순종한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훗날 구리뱀이 우상화 되어버리는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 우둔함은 오늘의 교회에도 만연합니다.
성경에서 생명과 사랑을 찾아야 하는데 사람 죽이고 잡는 것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큰 도서관입니다. 읽어서 생명의 진리를 찾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진리로 자유하면 가정과 교회가 천국되지만, 이 자유가 없는 사람들의 열심이 특심이면 지옥이 됩니다.